출소 후의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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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주

2005년 10월 11일 나는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입대를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그 후 19일에 내가 믿는 가톨릭 신앙과 양심으로는 군대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사회에 알렸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 미사에 참례하던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가톨릭 학생회에서 참으로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이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존재를 알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배우게 됐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입영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군대에 가기가 너무 싫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어려보이고 유약했던 나는, “군대에서 너 같은 애들은 여자 흉내도 내고, 선임 병이 막 만지고 그런대.”라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다가 2001년 언론을 통해 병역거부를 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듣게 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의해서 병역거부를 한다고 하는데, 나 역시 나의 신앙에 비추어 군대 문제를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내밀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가 평화를 지킨다고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결론은 명확했다. 나는 그렇게 병역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병역거부 의사를 밝히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고나서 2006년 1월 24일 구속 결정이 내려졌다. 많은 친구들이 불구속 탄원서를 써주었지만, 나의 실제 주거지와 서류상 주거지가 다른 것을 이유로 구속을 시켰다. 국가의 신성한 의무라는 병역의무를 거부하고, 국가의 통제를 따르지 않아서인지, 국가의 힘을 느껴보라는 건 아니었는가 싶다.

그렇게 구속이 돼서 보석 결정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구치소에서 그나마 병역거부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나는 천주교 신자가 예수를 팔아먹고 병역을 회피했다는 모욕을 들어야만 했다. 한 평생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나에게 그 모욕은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감방 안에서의 생활은 총만 들지 않았지, 실상 군대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껏 겪지 않았던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고, 방 안의 일 대부분은 막내인 내 역할로 정해져 있었다. 정신없이 방의 일들을 치러내니 한 달이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리고 3월 14일 보석으로 감옥을 나왔고, 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 감옥 밖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 정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고, 법원도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판결을 내렸고, 나는 상고심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9월 21일 보석이 취소돼 다시 구치소로 들어가게 됐다. 성실한 ‘근로’를 통해 교정을 받지 않으면 가석방을 받을 수 없으므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출력을 신청했다. 취사장으로 작업장이 결정되고, 1700여명 식사를 책임지는 일들을 하게 됐다. 출력 첫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앉아있는 시간은 식사 시간밖에 없었고, 그나마 10분 정도에 불과했다. 이곳에서는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제대로 못하면 그저 소리를 치며 다그칠 뿐이었고, 알아서 일머리를 배워야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며 들었던 생각은 내가 느끼는 고통이 대부분 ‘속도’를 중시하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너무 바빠서 일을 차분히 가르칠 시간도 없는 것이었다. 정말 그때만큼 느리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던 적도 없다. 사람들이 ‘속도’를 중요시 하는 이유를 지금 생각해보면,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인 것 같다.

1년 2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2007년 9월 28일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에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단체로 만나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단체 사진을 찍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출소한지 1년이 넘은 지금, 나는 좀 더 소박하고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는 삶이 폭력을 줄인다고 생각하고 그런 삶을 꿈꾸고 있다. 농사를 짓고 되도록 자립하는 것이 그런 삶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현재 귀농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조만간 나도 농촌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대체복무제도의 도입과 관련해서, 병역거부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임에도 직접 나서서 활동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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