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직접행동의 맥락 속에서 병역거부 운동이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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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비폭력직접행동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전히도 비폭력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고, 직접행동의 방식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보수언론이 비폭력=합법의 등식으로 비폭력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작년 2008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비폭력이라는 구호가 이제는 아주 생소하기만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그동안 비폭력의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혼재되어 있다.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군사주의 문화가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있었다. 20세기 초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경험과, 1950년대 한국전쟁의 경험은 국가를 비판과 견제의 대상이기 보다는,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근대국가를 경험해보기도 전에 빼앗겨 버린 국가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전쟁으로 다시 한 번 국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은 북한공산주의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거짓된 이미지로 치장하게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도 있었지만, 거대한 국가폭력에 맞서 ‘저항폭력’이라는 방식이 주로 선택되었다. 비폭력은 마치 국가권력에 대한 소극적인 긍정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일제 식민지 당시 일군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일본의 지배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타협했던 모습이나, 독재정권과 맞서 싸울 당시 비무장을 주장하는 일부 온건파가 보여준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저항폭력’의 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사회분위기 속에서 ‘비폭력’은 타협적이고 패배적인 방식이라는 뿌리 깊은 오해가 발생하였다.

비폭력에 대한 오해는 폭력에 대한 성찰을 무디게 하였다. 국가폭력에는 민감했지만, 민주화운동 내부의 여러 형태의 폭력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신체 건강한 남성노동자들의 거리투쟁- 마치 군대의 퍼레이드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사회운동 내부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여러 형태의 폭력들은, 국가의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대의를 위해서 눈감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1980년대 전방입소 반대투쟁, 1980~1990년대 군인과 전경들의 양심선언 등 자신의 양심에 기반한 비폭력 저항이 있었지만, 삶의 철학으로서 비폭력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200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병역거부운동은 비폭력과 평화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아무도 비판 할 수 없었던 군대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했고, 사람은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양심에 따라 부당한 명령과 요구에 불복종 할 수 있음을 알렸다. 아무 생각없이, 혹은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끌려갔던 젊은이들은 군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들 중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가 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물론 병역거부운동의 시작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군사주의와 국가주의가 해체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소수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획일화 된 사회였고, 국가폭력은 조금 더 세련되어졌을 뿐이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운동사회 내부에서도 여전히 물리적인 폭력을 비롯하여, 비민주적인 군사주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병역거부운동,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여성운동, 생태주의 등이 맞물리며,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조금씩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전쟁과 군대, 혹은 폭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직은 미약하지만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면서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는 여러 형태의 직접행동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느꼈다[1].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2]에서는 비폭력직접행동이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촛불집회에서 비폭력은 가장 대중적인 구호였다. 사람들은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퍼포먼스로 경찰폭력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이는 야만적인 경찰의 폭력과 대비를 이루며 많은 시민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이제 시민들은 정치권이나 언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폭력과 비폭력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누어 바라보기도 하고, 정권과 보수언론의 악의적인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준비부족과 이해부족은 시민들을 때로는 위험한 상황에서 처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아직까지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시위방식에서의 단순한 전술적인 선택으로 바라보는 측면도 있다. 때문에 때로는 비폭력이 저항주체들의 선택이기보다는 상부에서 지침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비폭력직접행동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이제 막 한국사회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마치 ‘평화’나 ‘비폭력’이 그러하듯이 병역거부운동을 비롯한 비폭력직접행동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가고 있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 삶에 기반해 세상의 잘못된 것에 맞서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디지만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주석

[1]자세한 내용은 비폭력 핸드북 '한국의 비폭력 운동:성과와 과제' 참조, http://wri-irg.org/node/6479

[2]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여고생들이 시작한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여타의 반민중적인 정책들에 반대하는 집회로 확대되어 2달 가까이 서울도심 한복판에서 날마다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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