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South

- 보이지 않는 이길준들을 위해

박정경수

병역거부를 고민한 건 21살 때였습니다. 처음 병역거부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태양의 병역거부는 제게 충격이기보다는 많은 질문이었습니다. 그건 보지 못하던 세상이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질문의 요청이었습니다. 딱히 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군대를 연기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두 여학생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은 우리들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만의 사람들이 시청 앞을 가득 매웠습니다.

임재성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그렇겠지만, 병역거부는 저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병역거부란 단순히 신념을 선언하고 감옥에 갇혔던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병역거부자-활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저는 평화운동을 해나가야겠다는 의지를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출소 이후 평화연구를 하겠다고 결정한 이후에도 병역거부는 가장 주요한 연구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그러한 저의 경험들과 깨달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옥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2008년 2월 25일 취임했고, 1년이 지났다.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권을 선택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자대통령을 뽑은 것이다. 도덕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문제들은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무마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정권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시장만능주의를 외쳤고,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 하에 재벌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사회는 더 불공평해졌고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시민사회의 통제가 가능할 것 같던 국가권력 기구들은 대통령과 집권정당에 의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정부 부처가 대통령의 지시를 처리하기 위한 기관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권에 따라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인 합의와 민주화운동의 성과마저도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절차와 소통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어떤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를 직접 겪은 일년이었다.

고동주

2005년 10월 11일 나는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입대를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그 후 19일에 내가 믿는 가톨릭 신앙과 양심으로는 군대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사회에 알렸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 미사에 참례하던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가톨릭 학생회에서 참으로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이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존재를 알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배우게 됐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by 염창근

저는 대학을 다닐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그 영향으로 졸업을 하고나서도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이 된다는 것이 아주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국가를 위해 무조건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한국 군대가 위계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자행해 왔던 강압적인 폭력 문화가 두려웠습니다. 제 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살상 훈련을 반복해서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징병제를 실시하는 한국에서는 입대를 피할 방법이 없었고 막연히 입대 시기를 미루기만 하는 방법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용석

비폭력직접행동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전히도 비폭력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고, 직접행동의 방식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보수언론이 비폭력=합법의 등식으로 비폭력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작년 2008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비폭력이라는 구호가 이제는 아주 생소하기만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그동안 비폭력의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혼재되어 있다.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군사주의 문화가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있었다. 20세기 초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경험과, 1950년대 한국전쟁의 경험은 국가를 비판과 견제의 대상이기 보다는,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근대국가를 경험해보기도 전에 빼앗겨 버린 국가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전쟁으로 다시 한 번 국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은 북한공산주의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거짓된 이미지로 치장하게 되었다.

편집자의 말

안드레아스 슈펙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이 처해온 극단적인 어려운 현실은 그동안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심지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처럼 국제적으로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단체들조차도 한국의 병역거부 현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by 현지
 
한국에서의 병역거부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중심으로 50년이 훨씬 넘는 기간동안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시간만 합쳐도 1만 여 시간이 훌쩍 넘는다. 독재정권 하에서 구타, 고문 등을 견디며 누군가는 숨을 거두었고, 누군가는 7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한국에서 ‘병역거부’가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초의 일이다. 그 후 사회적으로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사회에서의 병역거부 문제는 큰 이슈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질타로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겪어왔던 고통보다도 더 큰 심리적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1]

한국 병무청에서 의뢰하여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8.1%인 1,365명의 응답자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도를 허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대체복무 도입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인원은 28.9%인 580명이었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지난 10월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병무청 관계자가 전하였다. 국회의원, 변호사, 교수, 언론인, 종교계 인사 등 사회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85.5%가 대체복무 도입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났었다.

"원태제 국방부 대변인은 “국민적 합의에 기초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 도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국방부의 방침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면서도 “현재 상황에서 대체복무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국방부의 입장이다”라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병무청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매년 수백명의 징병대상자들이 병역을 거부하여 징역형을 선고 받고 있다. 작년에 발생한 병역거부자의 숫자는 약 570명 정도이다.

국방부는 여론핑계 그만두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라

12월 24일 국방부의 정례브리핑에서 병무청이 대전대학교 ‘진석용정책연구소’에 의뢰했던 연구용역결과의 발표가 있었다. 연구용역결과는 대체복무제도에 부정적인 여론조사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 편 국방부는 지난 7월에 “국민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대체복무제도의 시행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힌바 있어서 2007년 9월에 정부가 발표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가 전면 백지화 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양심상의 이유로 군대를 갈 수 없어서 스스로 전과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젊은이들이 해방이후 1만3천명에 달하며, 특히나 이 문제가 사회이슈로 부각된 2001년 이후에도 48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으로 향했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의 권고라든지, 유엔인권이사회의 수차례에 걸친 권고, 미국무부의 ‘2008세계종교자유보고서’ 등 국내외에서 대체복무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국방부는 국민여론을 핑계로 스스로 약속한 대체복무에 대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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