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에 대답하며
- 보이지 않는 이길준들을 위해
박정경수
병역거부를 고민한 건 21살 때였습니다. 처음 병역거부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태양의 병역거부는 제게 충격이기보다는 많은 질문이었습니다. 그건 보지 못하던 세상이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질문의 요청이었습니다. 딱히 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군대를 연기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두 여학생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은 우리들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만의 사람들이 시청 앞을 가득 매웠습니다.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라크만이 아니란 사실을. 세상 어디에선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그 외마디 고통들은 한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걸까요? 저는 많은 질문을 안은 채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야 했습니다. 목이 쉬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아팠습니다.
병역거부는 답이 정해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시간은 정해져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마냥 미룰 수만은 없는 문제였습니다. 하나 둘 알고 지내는 이들이 병역거부를 선택했고, 그 중 어느 누군가의 글을 읽고는 정말 더 이상 피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 아니라, 전쟁을 예방하고 막아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처럼 제3의 길, 비폭력 직접행동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역거부가 최선은 아니었지만 쉬이 다른 답이 없었습니다.
징역을 사는 시간은 모든 것이 온통 도전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고통스런 노동도, 사람들 사이의 경직된 관계와 정신적 폭력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문제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보아야 했던 표정은 늘 화나고 지친 얼굴들뿐이었으니까요.
감옥을 나온 뒤에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우습게도 병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징역을 살면서 매일 잠이 들지 못할 만치 이가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2주를 거의 잠도 못자며 고생했는데 이를 뽑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울고 싶어질만큼 힘들어서 병동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제가 들었던 대답은 같았습니다. 이를 뽑는 일도 그곳에서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엑스레이도 찍지 않은채 “사랑니를 뽑다 잘못 되더라도 네가 직접 책임을 져라“라고 협박하던 구치소 직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감옥을 나오자마자 이를 뽑았습니다.
병원을 가는 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쉽사리 뽑히지 않는 기억이지만 이를 뽑는 것처럼 그 기억도 뽑아내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옥에서의 기억은 그렇게 사소한 일에도 충치가 박힌 듯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잊고 싶은 기억은 있었지만 반대로 무엇을 시작해야할지는 정말 알 수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대답해야할 질문들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제게 병역거부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병역거부를 하고 난 뒤의 삶이 그 대답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면 경직된 채 살아가야 할까?”
가장 궁금한 것은 출소한 뒤의 삶이었습니다. 수년간 미뤄왔던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은 후련했지만 앞으로 짊어지고 살아야할 제약들은 무서웠습니다. 출소하고 저는 늘 병역거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끔은 그것이 버겁고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선택으로 아직까지 불린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사람은 늘 현재의 질문에 대답하며 살아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것도 같습니다. 늘 ‘병역거부를 했었다’는 과거형입니다. 병역거부자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 호감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더 혐오를 느낍니다. 자유로운지, 아니면 경직된 삶인지 지금 대답해야 한다면 아마 저는 경직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대답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가 세상에 다시 나온 2008년은 무언가 낯설었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정권이 바뀌었고 모든 것들이 시간을 거꾸로 흐르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채 몇 달이 되지도 않아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쇠고기 광우병 파동 때문이었습니다. 국민의 안전을 무시한 채 자신의 정치 논리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정권이 밉기도 했지만, 다들 그보다는 모든 일을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대통령의 태토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저는 조금은 무기력해 있었습니다. 감옥생활에 많이 지쳐있기도 했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사람들이 거리에 나갈 때 “나는 아직 가석방 중이야.”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무얼할 수 있을까. 굳이 연행될 상황을 피하면 되는데도 거리에 나가는 대신 “아직.”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런 제가 힘을 얻었던 건 이길준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주변에서 그를 돕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겠네요. 무자비한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길준도 대단했지만, 농성에 들어간 그를 밤낮으로 지켜주던 사람들을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잠시 무기력했던 저는 무엇을 피하고 싶었던 걸까요.
지금은 미군기지 주변에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대략 27,000명 정도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기지 주변에는 범죄와 훈련 피해, 소음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을 시작하며 문득 ‘처음으로 돌아왔구나. 생각했습니다. 처음 이렇게 병역거부를 고민할 때 바로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의 죽음이 있었으니까요. 감옥에 있을 때부터 줄곧 생각했던 것이 한국이 여전히 전쟁 중이라고 하는데 살면서 그것을 잘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뉴스에 북한이 나올 때야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군대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가 있다면 그건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지 주변에서 피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전쟁의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길준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삶으로 투쟁해야 했던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고. 지켜주고 싶었다고.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봅니다. 여전히 기지 주변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못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은 전쟁의 그늘을 싸워내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그들을 돕고, 응원하는 삶이 필요하겠다 생각했습니다. 뒤돌아서기보다 그들 옆에 한 발짝 다가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이길준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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