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병역거부 운동, 작지만 힘찬 발걸음
최 정 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한국에서 ‘병역거부’라는 생소한 단어가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초의 일이다. 당시 병역거부권을 포함한 병역제도 전반에 걸쳐 비공개 토론회를 준비한 것을 계기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거부 이야기가 한 시사주간지에 소개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미 국군 창설 이래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년 600여명의 병역거부자들(주로 종교적 사유로 인한 병역거부)이 생겨났고 그 인원이 전체 1만 여명이 넘는 동안에도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에서 없는 사람들로 취급되었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거쳤고 군사정권 아래서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펼쳤다. 국가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기치 아래 정권은 경제성장의 초점을 민중의 삶이 아닌 국가경제에 맞추게 되었고 한편으론 북한의 존재를 잘 활용하여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복종심이나 단결심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러한 군사화된 한국사회의 핵심에는 징병제 하의 군대가 있었다. 당연히 상명하복이나 전체주의적인 사고관이 온 사회를 주름잡고 있었다. 병역국가 대한민국에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편한 대상이었고 따라서 정권은 이들을 혹독한 탄압과 차별로 일관하게 된다.
병역거부 운동의 첫 발걸음
처음 ‘병역거부’를 비롯한 병역제도 전반을 논의할 토론회를 비공개 토론회로 구상한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징병제도나, 군대인권, 특히 병역거부의 문제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쯤으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또 토론회 이후 병역거부 운동을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벌여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 또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토론회를 진행하고 1주일쯤 후 서울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서 군대 반대, 군기피 방법 등을 게재한 인터넷 사이트 3군데를 수사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민, 사회단체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모였던 평화, 인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2001년 한 해 동안 각종 간담회, 세미나, 기고글 등을 통해 병역거부라는 것이 무엇이고 지난 50여 년간 병역거부자들이 사회에서 받았던 온갖 차별과 편견은 무엇인지를 알려나갔다. 병역거부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이 받은 고통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야겠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 신문사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병역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50% 이상을 넘어서기도 하였다. 그러한 결과는 다른 사람의 신념이나 양심에 대한 인정이기도 했고 인정할 수 없으나 그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는 사회적 여론의 결과라고 보여 진다. 하지만 또한 이 여론의 바닥을 흐르는 정서에는 병역거부자들을 불쌍하고 가엽게만 생각하는 선민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시 병역거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가장 첨예한 논점은 병역거부는 특정 종교인들이 하는 이상한 행동이므로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단에 대한 특혜라는 것이었다. 한국인구의 20%가까운 많은 숫자가 기독교인인데다가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이단으로 취급하여 철저히 배척해왔었다. 실지로 이러한 보수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은 대체복무제도 입법을 준비하였던 몇몇 국회의원들이 결국 입법의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작지만 아주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들에게, 그리고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젊은 사회운동가들에게 병역거부권은 굉장히 새로운 주장이었고 실천이었다. 병역거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가 퍼져나갈 무렵 자신의 고민에 대한 상담을 원하는 전화와 메일들도 간간히 접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1년 12월 평화주의자이자 불교신자인 오태양씨의 병역거부 선언으로 병역거부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회적 논의도 특정 종교인의 이단논쟁에서 나아가 기존의 전통적 안보관을 갖고 있는 보수우익들이 합세하면서 남북관계와 대치상황, 국가안보 등의 논의로까지 확산되었다.
병역거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한다?
2002년은 병역거부 운동이 가장 많은 논란에 휩싸인 시기이기도 했고 그 만큼 이 운동이 많은 고민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2001년 1년 동안의 인권단체들의 노력과 오태양씨의 병역거부 선언을 계기로 2002년 2월에는 병역거부자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36개 시민, 사회단체들의 연대모임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발족을 하였고, 연대회의 발족 바로 며칠 전에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처벌 이외에 대체복무 등의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는 현행 병역법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가려달라는 위헌재청심판이 청구되기도 하였다. 오태양씨의 병역거부 선언 이후 종교와 상관없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났고 지금 현재까지 총 8명이 병역거부 선언을 하였다. 특히 2002년 9월, 나동혁 씨의 병역거부 선언에는 20여명 가량의 대학생들이 함께 앞으로 입영장이 나와도 군대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병역거부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연대회의에서는 이렇듯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고민을 상담해 오는 사례가 늘자 연대회의 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 병역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는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되었고 또 겨울방학에는 병역거부 학교를 개최해서 군대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병역거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정보를 제공하였다. 사회에서, 특히 군입대가 인생에 있어 가장 고민스러운 시기인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처럼 병역거부 운동이 확산되자 지금까지 시민, 사회단체의 요구를 무시해왔던 정부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육부는 서둘러 각급 학교로 병역거부 운동의 확산을 막으라는 특별 지침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달했으며 국방부에서도 병역거부권 인정에 대해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0월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대통령이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병역거부 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 운동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국내의 상황이 아닌 남의 나라 문제에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반전의 한 목소리를 낸 것은 한국의 운동사상 거의 최초의 일이다. 또 많은 평화운동가들과 일반 민중들이 이라크 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에 들어갔고 이 명분 없는 전쟁의 증언자들이 되었다. 이 또한 최초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반전운동은 특히 한국군 파병 문제를 놓고 크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한 사람의 병역거부자가 또 탄생했다. 김도형 씨는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고 특히 한국군이 그것에 일조하게 되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특히 한국군 파병이 결정적으로 자신이 병역거부를 선언하게 되는데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고 명분 없는 전쟁에 일조하는 한국군에 입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이번 이라크 전쟁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국익을 위해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찬성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이러한 전쟁과 야만의 시대에 김도형 씨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의 신념은 더욱 옹호되고 보장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병역거부 운동은 이 시기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파병 결정 후 한국 군인들을 향해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전하기 싫다고 얘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시민, 사회단체의 목소리는 국익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국가의 생존을 벼랑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는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앞으로의 과제
올해 상반기에는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 모임이 병역거부자들과 이들을 지지, 지원하는 사람들의 조직인 ‘전쟁 없는 세상’이라는 단체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이스라엘에서 열렸던 국제병역거부자의 날 세미나와 비폭력 트레이닝 참가를 계기로 여름에는 병역거부자들과 군사주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자들이 모여 평화캠프를 개최하였다. 캠프에서는 비폭력주의와 병역거부 운동에 관한 의미, 군사주의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다양한 세미나가 개최되었고 의사소통과 권력분석에 관한 비폭력 트레이닝이 열렸다. 다른 세상에 대한 실험과 주체들의 훈련이라는 모토로 개최되었던 평화캠프는 조금은 미숙했으나 첫 발걸음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또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작업을 했던 병역거부 관련 다큐멘터리가 완성이 되어서 공개시사회를 개최했고 앞으로 순회 상영회 및 간담회를 예정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는 병역거부와 평화를 주제로 한 정기 캠페인도 계획하고 있으며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에는 시와 꽃과 촛불이 있는 작지만 따뜻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이제 겨우 3년의 역사를 가진 운동이다. 전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운동이지만 어느 나라보다 민주화운동이 치열했고 역사도 길었던 한국에서 병역거부 운동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구조적으로 군사주의가 강하게 작동했던 사회에서 어쩌면 한국의 운동마저도 거대한 적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적 외피를 둘러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병역거부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은 아직은 소수이다. 수십 년간 병역거부자들을 외면했던 만큼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어나가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다른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느리지만 힘 있게 전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러진 총 59호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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