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 역사

홍 영 일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

한반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기록은 1939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병역을 거부한 일본인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본 전역에서 6월 21일에 일제히 체포되면서, 6월 22일에는 타이완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6월 29일에 체포 선풍이 불고 지나갔다. 한국에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33명은 당시 일제 치하로서 한국인들에게 병역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반대 사상을 유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로 기소되었고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문태순, 최성규, 한순기 등은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며, 다수의 증인들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체포된 한국인 여호와의 증인 옥응련도 일본 동경의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4 년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인 로버트 R. 홀리스터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고 강범식이 최초의 한국인 여호와의 증인이 된 이후 1945년 이차세계대전 발발 시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수십 명 규모로 늘었다. 1932년 6월 11-13일 서울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는 총 45명이 참석하였다. 1939년 이후 이차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여호와의 증인 거의 대부분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투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차세계대전 후 한반도는 남한(이하 한국)과 북한으로 분단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양측은 한국전쟁을 벌였다. 그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고 남과 북의 치열한 대결 의식과 국가주의, 강화된 병역법, 군사독재 등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대규모 병역 거부 누적 숫자를 기록하게 되고 또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가 매우 희소해지는 특이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북한은 일체의 종교를 허용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로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한국전쟁 초기 전쟁 준비가 덜 되어 있던 남한은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수도 서울은 북한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사례는 북한 인민군의 강제 징집에 대한 거부의 형태였다. 당시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던 여호와의 증인 노병일은 북한 인민군 입대를 거부하여 총살을 당할 위기에서 "나는 양대 진영 그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법에 반대되는 어떠한 인간의 법 때문에 하느님의 법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밝힌 뒤, 풀려나는 경험을 하였다. 박종일은 1951년 1월 중공군에 의해 다시 서울이 점령되었을 때 북한의 비밀경찰에 붙잡혀 "그리스도인들로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서 피난을 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설명과 함께 여러 차례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 입장을 설명한 끝에 북한 인민 의용군에 징집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고, 1953년에는 남한 군대에 의해 징집되는 것을 거부하여 국방경비법에 의해 군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여 양 진영에 대해 병역을 거부한 병역거부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병역법 상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처벌하는 조항인 입영기피 형량은 1년 이하의 징역(병역법 제444호, 57.8.15)에서 3년 이하(병역법 제1163호, 62.10.1)로, 군 입대 후의 병역 거부에 대한 처벌조항인 항명죄의 형량도 2년 이하의 징역(군형법 제1003호, 62.1.20)에서 3년 이하(군형법 제4703호, 94.1.5)로 상향 조정되면서 점차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1961 년 5월 16일에 들어선 군사 정권이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그 이전인 50년대와 60년대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보통 수개월에서 1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곤 하였다. 대개 한 번의 처벌로 군인 징집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원조회가 철저히 운용된 까닭에 전과자의 신분으로 취업 제한 등의 커다란 사회적 차별을 경험하게 되었다. 윤경수(가명)은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후 모 시멘트 회사(당시 건설붐이 불고 있던 한국에서 이 회사는 입사 지망생들에게 대단한 선망의 대상이었다)에 취업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1968년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1년의 수감 생활을 한 후 군 미필자에 대한 채용 거부로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생활해 오고 있다.

1961 년 12월 27일 창설된 향토예비군 제도-제대 군인을 일정 기간 군사 훈련에 동원하는 제도-가 더욱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제대 후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복적인 처벌-체형, 벌금형 포함-로 많은 고통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법은 지금까지 존속하면서 병역거부자들에게 변함없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최홍기는 99년 제대 후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예비군으로서의 군사 훈련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약식 재판에 의해 35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졌고, 현재 다섯 건의 고발 건이 처리 중이며, 한 건의 재판에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이다. 무거운 벌금형과 잦은 재판으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누적된 실형까지 살아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1969 년 7월 22일 대법원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소위 양심상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은 구 헌법(62.12.26. 개정헌법) 제17조에서 보장한 양심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군사 정권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여 갖가지 불법적인 사례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정춘국은 입영을 거부하여 징역형을 선고받고 출감하는 날 병무청 직원들이 교도소 앞에서 그대로 연행되어 군부대에 강제 입소 당하였고 군부대에서 군사 훈련을 거부하여 도합 7년 10개월을 복역하였다. 우응섭의 경우 재판부는 2년이라는 법정최고형을 선고하고도 집행유예로 석방시켰다. 그 후 우응섭에게는 입대 영장이 다시 발부되었고 이를 거부하자 이전의 선고 형량을 합산하고 가중 처벌을 하여 당시 법정 최고형이 2년이었던 항명죄 조항으로 결국 5년을 복역시켰다. 이외에도 군사 훈련 거부로 육군교도소에 복역 중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군사 훈련을 거부한다 하여 다시 재판을 열어 형을 추가하는 등 행정, 사법 당국이 총체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특히 1975년 군사 정권의 최고 지도자였던 대통령 박정희가 입영률 100%를 전국 병무청에 지시하자 다양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군부대에 입소시키곤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강제 입영시키기 위해 그들의 집회 장소를 포위하고 있다가 군복무 연령대로 보이면 무조건 군부대로 끌고 가는 식이었다. 조영헌은 결혼식 직후 결혼식장에서 병무청 직원들에 의해 군부대로 끌려갔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강제 입영 관행은 한국 사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2001년도까지 지속되었고, 인권 보호와는 거리가 있는 군부대 영창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구속되어 있는 기간 동안 그리고 군인들이 수감되는 육군 교도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겪은 고초는 제도적 공격과는 별도로 매우 가혹한 경험이었다. 1976년 강제로 입영된 이춘길은 군 헌병대 영창에서 구타로 인해 사망하였고 많은 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출소 후 구타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박춘홍은 72~73년에 걸쳐 10개월 간, 75~77년에 2차로 1년 6개월 간 수감되어 있는 동안 9개월의 독방 생활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폐쇄공포증, 공황 장애 등을 경험하고 있다.

1970 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군사 훈련 수업이 시작되었고 여호와의 증인 청소년들이 이를 거부하자 학교 당국이 구타, 체벌, 회유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자퇴를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편견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렇듯 가혹해지고 사회적 편견이 심해지기 시작하자 그나마 비전투병과의 복 > 증인 청소년들이 이를 거부하자 학교 당국이 구타, 체벌, 회유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자퇴를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편견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렇듯 가혹해지고 사회적 편견이 심해지기 시작하자 그나마 비전투병과의 복무나 안식일 복무 불가 등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일부 종교의 병역 거부는 완전히 끊기고 병역 거부는 '사이비-이단'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들만의 전유물이 되기 시작하였고 2001년 12월 한 불교신자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선언하기까지 수십 년간 여호와의 증인만의 문제였다.

한국에서 군사 정권에 의한 통치는 1993년까지 지속되었는데, 80년대와 90년대에도 강제 입영의 관행은 지속되었고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는 병역거부자 억압 역시 존재하였다. 상관이 총을 두 번 주도록 하고 각각 거부한 것을 경합하여 법정 최고형인 2년의 1.5배를 선고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항소하자 대법원은 1992년 9월 14일 "상관으로부터 집총을 하고 군사교육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고도 여러 번 이를 거부한 경우에는 하나의 항명죄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 횟수만큼 항명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선고도1534판결【항명】)

대법원은 60년대 이후 일관되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해 오지 않고 있다. 1985년 7월 23일에도 향토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재판에서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법률이 규정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하였으며, (대법원선고도1094판결【향토예비군설치법위반】) 위에 언급한 92년 9월 14일의 판결에서도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법률이 규정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껏 내려진 이와 같은 판결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가 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닌지를 판결문에서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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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추세가 완화되고 한국군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육군의 군복무 기간이 30개월에서 26개월로 줄어든 1994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처벌 근거인 군형법 제44조 항명죄의 최고 형량을 2년에서 3년으로 높였다. (군형법 제4703호) 그 동안 법정 최고형을 선고해 왔기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94년부터는 자동적으로 2년 형 대신 3년 형에 처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 정권 시절의 가혹한 학대와 투옥 형량의 증가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는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90년대 여호와의 증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발생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연도이다.
220(92), 277(93), 233(94), 437(95), 355(96), 403(97), 474(98), 513(99), 683(00), 804(01), 734(02) (아래 표 참조)
<표>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수

민주화가 점차 진전되면서 2001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 이슈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줄잡아 100회 이상의 언론 보도와 많은 단체에서의 토론회 관련 자료들의 발표 등으로 한국인들이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은 관용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로 인해 2002년부터는 병무청에 의한 강제 입영 관행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민간 재판을 받게 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의 징역형을 선고하여 그 동안 군사 재판에서 기계적으로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던 것에 비해 다소 관대해졌다. 또한 2002년 1월 29일에는 현직 판사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병역법이 헌법에 어긋날 소지가 있다는 피고의 청원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이 사건이 계류 중이다. 그 이후 병역 거부를 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중 보석이나 불구속으로 약 150명이 풀려나 있다. 재판부에 따라 보석 적용 여부는 천차만별이다.

그 동안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 병역 거부자로서 처벌을 받은 수는 일만 명을 넘고 있으며, 구체적인 통계가 수집된 지난 2001년 12월 20일 교도소에 수감된 전체 병역거부자 1,640명이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해마다 발생하는 병역 거부 사례는 그 이후에도 꾸준하지만 수감 기간이 3년에서 1년 6개월 정도로 줄어들고 또 일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 때까지 재판이 연기되면서 보석 등으로 풀려나 2003년 8월 30일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로 복역 중인 여호와의 증인의 숫자는 767명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이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을 치른 남과 북이 여전히 대치하고 있어 병역법이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의 가장 큰 특징은 여호와의 증인 이외의 종교에서 병역거부자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드물어 병역 거부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을 매우 어렵게 만든 하나의 주요 이유였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인한 누적 및 현 수감자 숫자가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많다는 것이다. 660만여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하고 있는 전 세계 234개 나라와 지역 중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여호와의 증인이 수감된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 5개국이며 그 총수는 70명이다. 이 수를 한국에 수감된 767명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점차 비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가 출현하고 또 사회적으로 관용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 머지않아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책이 제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부러진 총 59호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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