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ion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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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은 유엔의 인권감시기구들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그동안 매우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 병역거부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구 인권이사회(현재 인권위원회로 승격)나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의 병역거부권에 관한 리포트(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과 함께 공동작성한 보고서도 있음, /node/6240 참조)를 제출한 바 있다. 2006년, 민변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자유권규약위원회가 ‘최종견해’를 통해 한국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들이 군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1. 배경 및 개괄

주한미군은 1950년부터 한국에 주둔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주한미군의 주 역할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이 변화하면서 기존에 대북 전쟁억지를 목적으로 주둔하던 주한미군이 최근 재편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역군, 신속기동군으로 변하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의 재배치는 2000년 미국의 요구에 의해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를 원했고, 방치된 육군 훈련장과 기지들을 통합하기로 하였으며, 공군 기지의 확장과 미국 해병대를 위한 전용 훈련장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에 2002년 한국과 미국은 연합토지관리계획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의 징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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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엄격한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징병제 등록은 18살이 되는 해에 모든 남성들에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19살에는 신체검사를 받게 된다. 군대 입영의 의무는 31살이 될 때까지 유효하며 징병 기피자의 경우에는 그 의무가 36살까지 지속된다.

병역은 2년 간 지속된다. 또한 많은 수의 징병자들(연간 삼십에서 삼십오만의 징병자들 중 이십만명 정도)은 병역 의무를 행정 혹은 기타 업무로 대신하며 4주 간의 군사훈련만을 거치게 된다. 그들의 경우 병역은 26개월간 지속된다. 어떠한 방식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할 지는 신체검사 결과와 군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군을 제대하고 난 후에도 징병자들은 8년 간 160시간의 군사 훈련을 받을 의무를 지게 된다.

68 만명의 한국군 병사들 중에서 75퍼센트가 징병자들이며 나머지 25퍼센트는 전문직 군인들로 이루어진 사관 및 장교들로 구성된다. ‘국방 개혁 2020’ 계획에 따르면 한국은 2020년까지 전문직 군인들의 비율을 40퍼센트까지 증가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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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러진 총>에서는 한국 병역거부자들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에서 한국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소식지를 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관련 소식을 내보낸 것은 지난 2003년 평화수감자의 날을 맞이했을 때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약 750명의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 있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수감된 한국 병역거부자들의 숫자는 400명 정도로 예전보다 줄어든 숫자인데, 이와는 무관하게 병역거부자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은 예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런 맥락 속에서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과 연대회의는 2009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의 초점을 한국 상황에 맞추기로 결정을 하였다.

오리

일본 식민지배 35년, 해방되자마자 시작된 미·소 강대국의 조선분할통치, 전쟁, 분단, 군부독재정권의 등장과 레드컴플렉스, 그리고 최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과 남북 간 군사적 대결완화를 위한 합의들이 사실상 무효화됨으로서 고조되고 있는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까지 한국의 군사주의를 짧은 지면 안에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과거들이 아직도 채 정리되지 못한 채 사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요. 물론 한국 사회에 민주화가 진척되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사실상 끝난 지금 과거와 같은 반공이데올로기는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현재와 만나 또 다른 세련된 군사주의 괴물을 만들어내고 교묘하게 사회 곳곳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 보이지 않는 이길준들을 위해

박정경수

병역거부를 고민한 건 21살 때였습니다. 처음 병역거부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태양의 병역거부는 제게 충격이기보다는 많은 질문이었습니다. 그건 보지 못하던 세상이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질문의 요청이었습니다. 딱히 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군대를 연기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두 여학생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은 우리들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만의 사람들이 시청 앞을 가득 매웠습니다.

나는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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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준

저는 지금 현역 의경으로 복무를 하다 특별외박을 나와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선언하려 합니다.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이 야기할 수많은 고통과 상처들, 특히 제 부모님이 겪으실 일을 수없이 생각했고, 그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과정은 괴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꽤나 거창하게 들리죠. 하지만 제가 하려는 일은 엄청난 대의를 가진 일이 아닙니다. 단지 삶에 있어서 제 목소리를 가지고, 저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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