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자 이야기

나동혁 (27세, 서울)

해방 이후, 50년간 한국에서는 약 1만명의 병역거부자들이 투옥되었는데 이들은 99% 이상 여호와의 증인이다. 20세기가 되어서야 군사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 속에서 사상적, 정치적 신념을 가진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났다. 9.11 테러 이후 한국 사회에도 본격화된 반전평화 행동이 이들의 신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로 비여호와의 증인으로는 4번째 병역거부자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 꼬뮨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경험은 국가권력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심어주었다. 반면, 우리 안에 내면화된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한 편이었는데 이는 집단주의적 정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생운동의 강한 영향 때문이다. 앞서 병역을 거부한 3명의 비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들과 접촉과 공동행동은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반전평화 운동의 경험과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거쳐 병역거부에 이르게 되었다. 평화로운 수단으로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평화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전쟁시스템을 뒤엎어야 한다는 것. 작년 9월 12월 병역을 거부한 결과, 1심에서 실형 1년 6개월을 받았으나 2심에서 보석으로 풀려나와 재판이 계류 중인 상태다. 재판이 다시 시작될지 몰라 신분이 불안정한 상태다. 현재 학업을 마치기 위해 대학에 다니면서 병역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없는 세상이라는 단체에서 평화 행동에 함께하고 있다.

김창식 (50세, 충북 음성군)

1970년 군사정권에 의해 고등학교에서 군사 훈련 수업이 시작되자 당시 장호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호와의 증인 김창식은 군사 훈련 수업을 거부하였다. 학교 측은 헌법상 보장된 교육 받을 권리를 감안하여 즉시 퇴학시키는 대신 교련 수업을 '참관'토록 하였다. '참관'의 내용은 운동장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갖가지 압력으로 인해 당시 17세였던 김창식은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퇴를 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던 김창식은 1974년 입영 영장을 받고 병역을 거부하여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청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만기 출소하던 날 교도소 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무청의 검은 지프차에 태워져 육군 제37사단 신병훈련소로 끌려갔다. 어떠한 영장도 제시되지 않았다. 병역 거부 입장을 밝힌 후 대전 3관구 헌병대에서 90일 동안 구속 수감된 그는 매우 가혹한 학대를 경험해야 하였다. 90일 내내 엎드려뻗치기, 원산폭격과 같은 기합이 계속되었고, 헌병 곤봉으로 손바닥, 가슴, 발바닥을 각각 50대씩 총 150대를 맞은 날도 있었다. 맞은 직후에는 발바닥이 너무 부어올라 지급받은 군화가 발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헌병대의 한 중사로부터는 4시간을 연달아 맞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90일을 보낸 후 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재판 때까지의 미결 기간을 형기에 포함시켜 주지 않아 헌병대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기간은 그냥 허공으로 날린 채, 육군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빨간 벽돌 위에서 주먹 쥐고 엎드려뻗쳐를 한 채 얻어맞다 보면 주먹의 피부가 모두 벗겨져 피가 흐르기 일쑤였다. 총 개머리판으로 엉덩이를 맞다가 개머리판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러면 헌병은 오히려 화를 내며 10대씩 더 때리곤 하였다. 당시 육군 교도소의 경례 구호는 '때려잡자 김일성(당시 북한의 최고 지도자)'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구호를 거절한 것은 이런 뭇매의 또 다른 사유였다.

결국 김창식은 병역법 위반으로 8개월, 군형법 위반으로 3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실제로는 불법 구금된 기간을 합쳐 4년이 넘게 복역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창식은 70년대 중반 군사적 분위기를 강조하던 당시 국가 제도와 그 분위기에 휩쓸린 군인들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은 수많은 병역거부자 중 하나가 되었다.

정춘국 (55세, 충남 금산군)

여호와의 증인 정춘국은 21세인 1969년에 병역을 거부하자 병역기피죄로 10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26세인 1976년 다시 징집이 되었고 이를 거부하자 1심에서 3년 구형에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하자 고등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3년형을 선고하였다.

만 3년간의 실형을 살고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하는 날 병무청 직원이 다시 징집영장을 들고서 교도소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77년이던 당시 29세의 정춘국은 32사단 군부대로 강제로 끌려가면서 병무청 직원들로부터 '병역법상의 전과는 전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또 징집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병역법에는 '고졸은 만 28세, 대졸은 만 30세가 되는 해 12월 31일까지 징집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의예과 1년 중퇴인 정춘국이 의대 4년을 졸업한 것으로 기록하여 징역을 살고 나온 정춘국을 재징집한 것이다. 그리고 32사단에서는 병역법 전과가 있다고 누범 가산을 하였다. 징집을 할 때는 전과를 인정하지 않은 점을 기억하는가?

1977년 그리하여 항명죄에 대한 최고형 2년의 두 배인 4년을 선고하였으며, 이 재판을 받기까지 그는 구금되어 있는 군부대 내에서 무릎을 꿇리고 가슴을 군홧발로 걷어차서 뒤통수를 시멘트 바닥에 메치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

결국 정춘국은 병역거부로 인해 '병역기피죄'로 3년 10개월, 항명죄로 4년 등 도합 7년 10개월의 실형을 가석방 없이 살았고, 21세에 첫 실형을 살기 시작해서 33세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형기를 마칠 수 있었다. 의사 지망생이었던 정춘국은 현재 자신의 당초 희망이었던 의사의 꿈을 접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부러진 총 59호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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