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violence Hand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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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lal Demir and Ferda Ülker

"비폭력은 단지 폭력이 부재한 무언가가 아니다"

군사주의와 가부장주의는 터키 사회에 뿌리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최근 터키 '남동부' 쿠르드 족 거주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적 편견이 깊숙히 내재한 전쟁이다. 터키에서는 군사주의에 의문을 표하는 모든 시도들이 곧 '반역'행위로 여겨진다. 폭력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 장년층 그리고 종교적/민족적/정치적 소수집단들이다. 터키 사회에서 폭력은 그동안 너무나 내면화 되어서 대안적인 관점들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대안그룹 내부에서조차 가부장적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터키사회에서 군대가 미치는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한' 남자로 인정을 받는 것 199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거를 통해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각군참모총장들이 포함된)의 결정.('새로운 형태의 쿠데타(the post-modern coup') 경제적인 권력: 터키 군대의 물자 공급을 담당하는 한 기업(OYAK)이 터키 내의 가장 힘있는 투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음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이 군대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

터키 공화국은 오토만 제국이 무너진 뒤인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수립되었다. 강력한 군대의 유지와 '국가의 불가분성'에 대한 케말 세력의 원리는 군형법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지금까지 국가의 근본원리로 작동해왔다. 이와 같은 기치들은 터키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들을 초래했는데 예컨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가족 내에서나 수형시설에서 하급자에 대한 육체적인 폭력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발

비폭력이라는 단어는 1992년 '이즈미르 전쟁저항자 연합(Izmir War Resisters' Association, IWRA)'의 창립원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단체에서 비폭력은 항상 논의 주제가 되었는데 특히나 폭력적인 한 문화 내에서 비폭력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어떻게 찾을지가 주 관심사였다. 우리는 그룹 멤버인 오스만 뮤랏 윌케가 병역거부로 투옥이 되어서 그를 면회하러 가고자 했을 때 맞닥뜨릴 상황을 시나리오로 삼아 연습하면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누구도 우리 그룹에 비폭력을 의논하러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사람들이 비폭력에 좀 더 관심을 갖는 편이다. 비록 이 '전쟁저항자 연합' 그룹이 멤버들의 기력 소진으로 2001년에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즈미르 전쟁저항자 연합(이하 IWRA)'이 채택한 비폭력의 운동방식은 다른 좌파 운동 그룹과는 선명한 대비를 보였다. 당시 다른 좌파 그룹들은 우리 IWRA의 운동방식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유약하고 비효과적인 운동방식으로 여겼다. 이에 자연스레 우리는 주로 반군사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페미니스트 활동가들로 구성이 되었다. 아마 비폭력의 구호를 가장 큰 환영한 것은 당시 비폭력의 원리를 바탕으로 운동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에 있던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그룹이었던 것 같다.

정치적인 연대의 차원에서 우리와 가장 활발히 교감을 했던 것은 여성운동 그룹이었다. 처음 우리 운동이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여성 반군사주의 그룹을 구성하여 다른 여성 그룹들과 연대를 도모하고자 했다. 초기의 여러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침내 많은 개인단위의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여성 그룹들과 함꼐 트레이닝을 열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여성 운동 내부에서 기존의 좌파적 운동 방식이 아닌 새로운 그녀들만의 운동방식을 모색하던 고민과 우리 그룹의 지향이 맞아떨어진 측면도 존재한다. 여성들에게 있어 폭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장 첫번째 제기되는 질문이었고, 비폭력은 그녀들에게 그 해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좀 더 많은 여성들이 내적 자기 강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여성 그룹 사이의 연대는 깊어갔다.

우리와 가장 정치적으로 긴밀했던 그룹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그룹이었다. 왜냐하면 이 그룹은 비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터키 병역거부자들이 완전거부자(즉 군복무와 여타 대체복무 모두를 거부하는)들이긴 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개인적인 성향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폭력에 대한 논의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였다. 터키 병역거부 운동 그룹의 지향은 비폭력에 관해서는 애매모호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모호함은 특히나 그들이 쿠르드족 해방 운동이나 기존 좌파 운동 그룹 출신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때 드러난다.

이즈미르 비폭력 트레이너 양성 운동

이즈미르 비폭력 트레이너 양성 운동(The Izmir Nonviolent Trainers Initiative, INTI)이 다른 곳의 도움을 받아 IWRA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이 운동이 질적으로 성장을 하는 데에는 독일 쿠르브 뷔스트로(Kurve Wustrow)의 트레이닝 코스와 1996년 4월 터키 포카 지역에 개설된 트레이너 양성 국제 트레이닝 센터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이즈미르 지역에 살았던 두 명의 독일 출신 트레이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2001년 겨울 IWRA가 활동을 종료했을 때에도 이 트레이너 양성 운동은 계속 되어서 이즈미르 지역 뿐만 아니라 터키 남동부 '위기' 지역인 디야르바키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트레이닝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진행이 되었다. 지금은 주로 자원봉사 형식으로 결합을 하고 있는 다섯 명(여성 넷, 남성 한명)의 트레이너가 있고 이들은 여행비용만 받으며 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 시간제로 결합하는 트레이너에게는 활동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2006년 6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2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트레이너를 위한 트레이닝 코스가 시작되었다.

트레이너 양성 운동(INTI)의 목표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위계주의와 가부장주의의 대안으로서 비폭력적인 원리와 구조를 설계하고 신장시키는 데에 있다. 우리의 대중적인 활동은 비폭력과 병역거부에 관한 세미나 그리고 집회를 기획하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비록 경찰이 우리가 작업한 많은 문서들을 몰수해가긴 했지만 우리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뿌리기도 했고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트레이닝 과정에서는 국회 바깥의 재야 그룹들, 인권단체, 여성단체, LGBT 운동단체 그리고 정당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즈미르 변호사 인권 센터'와 함께 변호사 집단 그리고 경찰들에게 인권 이슈들에 대한 교육도 진행하였다. 대략 우리 트레이닝에서는 풀뿌리 정치 운동 안에서 비위계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한 내용이나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 (가정과) 사회에 잠재한 군사주의적 속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비폭력적인 대안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개인적인 태도나 참여자들의 행동들은 항상 우리 워크샵의 기본적이고 주요한 주제들이다. 우리는 이론적인 기반들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비폭력 그리고 비폭력 행동들에 관한 실제 경험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헨리 데이빗 소로, 간디에서부터 오늘 날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이론적인 토대들에는 비폭력에 대한 아나키적 접근에 관한 내용, 아우구스토 보울(Augusto Boal)의 저서 '억압받는 자들의 극장(Theatre of the Oppressed)', 진 샤프(Gene Sharp)의 비폭력 전략 등이 있다.

우리 그룹은 모든 종류의 불평등, 차별을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따라서 폭력 역시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비폭력 행동과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방법을 계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믿는다. '비폭력은 미래 어느 순간에 달성될 열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금 이 순간의 수단'이라는 기치 하에 우리는 그 동안 '중립적'으로 보여졌던 일상의 행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원리와 가치들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비폭력의 방법과 수단들을 배우고 실천하고 가르쳐왔다.

우선, 우리는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신들의 의제로 설정하고 있는 다양한 단체들과 개인활동가들에게 하루 일정의 '입문' 트레이닝 과정을 제공한다. 둘째, 우리는 특정 그룹의 요구와 관심사를 반영한 '주제 기반 트레이닝'을 제공한다. 여기 주제들에는 편견, 갈등해결, 의사소통, 성차별 등이 있다. 셋째,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트레이닝 코스를 모두 밟은 뒤에 트레이너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에 대해서는 일주일 과정의 '트레이너를 위한 트레이닝' 집중 코스를 제공한다. 이 과정은 날로 증가하는 '트레이너 양성코스'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개설된 것이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위의 첫 두번째 트레이닝 과정을 여성그룹, 성소수자 커뮤니티, 인권단체, 생태집단, 평화단체 그리고 이즈미르, 망카라, 안탈리아, 아다나, 디야바키르에 있는 반군사주의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진행을 해왔다.

우리의 트레이닝 과정에 참여를 했고 트레이너가 되고자 했던 많은 개인들이 이미 벌써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폭력의 원리를 실천하고 폭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문제는 '비폭력 행동'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야르바키르(옮긴이 주, 쿠르드 족 관련 분쟁지역)에서 우리는 ('명예로운' 살인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 등과 같은) 근본적 행위들에 대한 비폭력적인 해결 방식 계발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비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작업에 대한 격려와 지지를 필요로 했고 동시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에 비폭력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신장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한 번의 일주일 과정 트레이닝에서 비폭력의 모든 원리들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에 우리가 강구해낸 해결책 중의 하나는 모임에서의 논의를 지속하면서 다음 트레이닝을 위한 피드백을 유도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세 번째 트레이닝(옮긴이 주, 트레이너 양성과정)에서 터키 전지역의 트레이너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이 네트워크의 운영 원리를 모색하는 과정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트레이너 네트워크' 접근 방식을 통해 우리의 논의들을 지속하고 비폭력 트레이너 사이에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적, 전국가적 차원에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퍼뜨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

우리는 비폭력의 개념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가 기반이 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터키의 군사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폭력의 문화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비폭력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이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삶의 모든 차별들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비폭력 트레이닝 트레이너들은 사람들에게 비폭력에 관한 실제 경험을 제공하고 그들의 그룹에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줌으로써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비폭력 행동

터키에서 진행되었던 비폭력 운동의 사례들을 봤을 때, 그 행동들이 모두 완전히 비폭력에 기반한 것들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폭력이 하나의 근본원리로 작동하는 동안에도 몇몇 조직들의 비폭력 행동에서는 행동을 위한 비폭력 트레이닝이 빠지는 것과 같이 진정한 비폭력 행동이 되기 위한 몇몇 요소들이 결여되기도 하였다. 터키에서 그 동안 펼쳐진 주요한 비폭력 행동의 사례로 '밀리투어리즘 페스티벌'을 들 수 있다. 매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에 맞추어 진행되는 이 페스티벌에서는 서로 다른 도시들에 있는 주요 군사적 상징을 방문하고 대안적인 행사를 개최하며 병역거부자들의 선언이 이루어진다. 다른 사례로는 터키에서 진행중인 전쟁을 상기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던 '우리는 그것에 마주하고 있습니다(We Are Facing It)'라는 행사가 있다. 이 행사에서는 3개월에 한번씩 큰 행동이 펼쳐지면서 일년 내내 지속이 되었다. 여기서의 목표는 거리 극장과 같은 비폭력 방식을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비폭력 행동으로는 터키 행정의 중심도시인 앙카라의 군부대 앞에서 펼쳐진 '쌀의 날(Rice Day)' 행사가 있다. 우리는 군부대 앞에 가서 '우리는 바로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전형적인 역할모델을 전복하는 반군사주의자들로써, '쌀의 날' 상징물들을 활용하여 우리의 연대감을 도모하고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지금 열거한 큰 행사들과는 별개로 작은 단체들에서는 단기적인 정치적 목표를 위한 행동들을 조직해왔다.

마치며

터키에서 비폭력이 존재해 온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는 대개 주변부 취급을 받았고 우리의 행동 역시 기대했던 만큼 효과적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성 단체와 성소수자 운동 그룹 덕분에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운동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우리가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정치적 그룹들의 날로 증가하는 비폭력 트레이닝에 대한 요구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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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미국 CIA와 닉슨 행정부의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정권이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이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리쉴라 하이너는 그녀의 책 (Unspeakable Truths, Confronting State Terror and Atrocity , 2001)에서 독재정권이 낳은 참혹함들을 그려냈다. “독재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하는 한편 대규모 체포, 고문(고문된 사람들 숫자는 최소 5만명에서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음), 살인 그리고 실종과 같은 자신들의 억압적인 정책들을 정당화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 독재정부는 수천 명의 반(反)정부 인사들과 입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고문하거나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같은 칠레 독재정권의 위협과 공포 속에 사람들 사이에는 불길한 침묵 상태가 이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비폭력의 힘에 대한 간디의 통찰력이 독재와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정립되고 발전해온 비폭력은 불의에 맞써 싸우는 하나의 갈등 해결 수단이자 원리를 의미하며, 더 넓게는 하나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비폭력은 부당한 상황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는 하나의 행동을 의미한다.)

진실을 향한 외침

우리는 사람들이 독재에 맞서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활동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다. 독재정권이 휘두르는 직접적인 폭력으로부터의 고통 뿐만 아니라 공포심으로 인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데에서 비롯된 자괴감도 감내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비밀 팜플렛과 리플렛을 찍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협을 감수하고 밤마다 거리의 벽들에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고발하는 선전물을 붙이고 다녔다. 이와 같은 행동의 기반에는 적극적인 비폭력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당한 독재정권에 맞서 이를 알려내지 않으면 우리 역시 독재정권과 공범자가 되고 만다는 믿음이었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행동들을 통해서 점차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알려내고 행동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설령 더 큰 위험에 봉착한다 할지라도 비밀리에 행해지는 저항 이상의 행동이 필요했다. 그 동안 수면 아래에서 칠레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행동들을 이제 대중적인 차원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문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움직임

카톨릭 신부이자 나중에는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The Sebastian Acevedo Movement Against Torture)의 대표를 맡았던 호세 알듀나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를 찾아와 (고문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한 내용과 비폭력의 역동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고 빈곤(에 저항하는 시위)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그룹이 견지한 원리에도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숙고 끝에 그 당시 벌어지고 있던 칠레 정부의 고문행위를 규탄하는 비폭력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의무가 있었고, 고문에 대한 침묵들을 걷어내어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은지 10년만인 1983년 9월 14일, 고문에 반대하는 운동은 산티아고에 있는 국가조사센터 본부 앞에서의 행동으로 막을 올렸다. 약 7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차도를 가로막고 '고문은 여기서 끝이 났다'라고 쓰여진 배너를 펼쳤다. 그들은 칠레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고 자유를 위한 찬송가를 불렀다. 이 운동 그룹은 1990년까지 매달 최소 한번씩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꾸준히 펼쳤다.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정부기관들로 하여금 고문 사례들에 대해 조사하고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주요 목표는 칠레에서 고문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고문에 대한 전(全)국가적인 자각을 일깨울 수 있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칠레에서 고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독재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1988년, 광범위하게 전개된 '위협반대' 캠페인에 이어진 '피노체트 반대 ' 비폭력 캠페인의 결과, 피노체트의 장기집권에 관한 국민투표는 결국 부결되었다. 피노체트 재임 중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여러 진상규명의 노력들과 국가적인 차원의 화해를 위한 시도들이 존재해왔지만, 비폭력 저항은 다른 어떤 수단들보다도 독재를 끝장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Roberta Bacic is a Chilean human rights researcher and activist who now lives in Northern Ireland. She has worked with War Resisters International’s Dealing with the Past Program. A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reviously published in the "100 Years of Gandhian Nonviolent Action" special issue of Peacework Magazine. For more info on Gandhi and Gandhianism, see more WRI links, and selected links to historical Gandhianism from the Peacework issue mentioned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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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클락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국제연대에 대한 호소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 1959년에 시작된 반(反)인종차별정책 운동진영에서는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널리 알리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전략으로 여겼다. 1960년 남아공에서 '샤퍼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이 발생하면서 각국의 정부들도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남아공이 영국연방에서 퇴출되였고, 1962년에는 유엔의 주관으로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어 그 이듬해 무기사용 금지를 골자로 하는 협정이 '자발적'으로 체결되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정책은 철회된 것은 한참 뒤인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 당시에 남아공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무역과 투자에 관한 것을 포함한 경제적 제재, 문화적 차원에서의 보이콧, 그리고 운동경기에서의 보이콧 이렇게 세 가지가 제재의 큰 틀을 구성하였다. 문화적인 차원 그리고 운동경기에서의 보이콧은 남아공에 심리적 차원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에 열렸던 올림픽에 남아공은 출전기회를 박탈당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럭비와 크리켓 국제대회 출전도 거부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남아공이 출전하는 테니스와 럭비 경기들을 방해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세계 곳곳의 항의행동들이 가한 압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아공에 대한 경제적인 제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왜냐하면 당시에 영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유엔이나 영국연방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 샤퍼빌 대학살이 벌어진 후 촉발된 것으로 여겨지는, 남아공에 대한 민중적 차원의 '제재'와 운동들은 계속해서 펼쳐졌다. 이 민중적 차원의 운동이 절정일 무렵에는 심지어 영국 노동당 당수도 남아공에서 생산된 과일 구매 거부 운동에 지지를 표하기도 했다.

나는 남아공에 반대하는 이러한 운동에 뒤늦게 동참을 하였다. 학생신분 시절이던 1969년, 나는 그 당시 남아공에 대한 스포츠 보이콧에서 촉발된 좋은 분위기를 경제적 차원의 제재로까지 이어보려고 했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속해 있는 학생운동 그룹에서는 대학당국으로 하여금 남아공에서 생산된 과일을 구매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이미 채택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운동의 타겟을 바클레이 은행으로 잡았다. 당시 바클레이 은행은 가장 많은 영국 학생들의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은행이었고, 내가 다니던 대학 역시도 바클레이 은행과 거래를 맺고 있었다. 이 운동에서 거둔 우리의 첫번째 성과는 바로 신입생들이 바클레이 은행 계좌를 열지 않도록 만드는 것과 기존 바클레이 은행 계좌 소유자들에게는 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자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두 번째 성과는 학생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렌트비용을 바클레이 은행 계좌에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는 활동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마침내 대학 당국이 한 발짝 물러서게 되고, 대학 운영위원회의 주요 위원들이 사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은행에 대한 이와 같은 압박 운동은 각지의 노동조합 지부들이나 각종 단체, 모임들, 교회 등 영국 전역에 걸쳐 논쟁을 초래했다. 1972년, 나는 에 기고한 글 때문에 퀘이커 그리고 평화서약연합(Peace Pledge Union)과 트러블을 겪기도 하였는데, 글에서 나는 퀘이커와 평화서약연합을 향해서 그들이 바클레이 은행계좌 철회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남아공에서의 비폭력운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썼기 때문이다. 바클레이 계좌 철회 운동에 지역 인사들도 참여를 했고, 결국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된지 16년 만인1986년, 바클레이는 남아공 지부를 매각하였다. 그리고 협동조합(역자 주, 영국의 큰 소매체인 중 하나) 슈퍼들도 남아공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구매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다.

위에 소개된 형태의 보이콧이 힘을 얻은 것은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각계의 우려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1976년 소웨토 지역에서 벌어진 경찰에 의한 학살, 1977년에 있었던 스티브 비코의 죽음(역자 주:당시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던 주요인사 중 한명, 구속된 후 경찰에 의한 구타로 사망)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불어왔고, 1980년대에는 남아공 연합민주전선 대변인 데스몬드 투투에게 가해진 위협처럼 남아공 내부에서 벌어진 위기 상황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하였다. 이와 같은 이슈들 속에서 실제 보이콧을 열심히 전개했던 주체는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노조와 교회가 기업들에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 노조와 교회가 남아공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영국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정책 반대 보이콧은 보통 지루한 '긴 행진'이 주를 이루었다. 국지적 차원에서는 각 지역 의회들이 남아공에 반대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채택하는 등 성공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가렛 대처 정부가 남아공에 반대하는 정책들을 펼치는데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국이 남아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꾸준히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하였다.

남아공 반대 보이콧들은 국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띄었다. 1970년대에 우리 영국인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남아공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앙골라로부터 수입되는 커피에 보이콧을 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980년대에는 아일랜드 최대 소매업계 중 하나인 '던스'의 노동자들이 남아공 상품 판매에 반대하는 파업을 4년에 걸쳐 펼쳤고, 이 파업은 아일랜드 정부가 마침내 남아공 상품 반입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비로소 종결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던 보이콧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지역 중 하나였다. 미국 시민들에 의한 남아공 반대 캠페인은 크게 대학가, 은행 그리고 공기업 이렇게 세 군데에서 펼쳐졌다. 그들이 거둔 성과는 상당했다. 보이콧이 시작된지 19년만인 1985년에는 남아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큰 은행이었던 체이스 맨하탄 은행이 앞으로 더 이상 남아공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1991년을 기준으로 당시 28개 주, 24개의 카운티, 92개의 도시 그리고 버진 아일랜드가 남아공에 대한 일련의 제재 정책을 입법화하였다. 1987년 말 기준으로는 200개 이상의 미국 기업들이 남아공에 대한 투자 철회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물론 제너럴 모터스(GM)나 IBM과 같은 몇몇 기업들은 다른 루트를 통해 남아공에서 자신들의 사업을 계속 진척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미국의 보이콧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대중들이 보이콧 운동들 과정에서 인종차별문제를 몸소 깨닫게 된 점과 대중들이 남아공 내에서 펼쳐지던 운동과의 연대감을 형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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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 지원 그룹

수감된 사람들을 지원하는 'MOC(Movimiento de Objeción de Conciencia)'의 활동은 수천의 완전거부자들의 수감을 불러온 징병 반대 시민불복종 운동(1971년-2002년)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수감자들을 지원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제안되고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의심의 나위 없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활동은 바로 '수감자 지원 그룹'의 활동이다.

실제로 이 '수감자 지원 그룹'들이 어떻게 활동하게 되는지 한번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보자. '거부'씨는 자신의 불복종의 댓가로 2년 4개월 하고도 하루의 형기를 살게 될 것이다. 수감이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친한 친구, 가족들과 자신이 속한 운동 그룹에서 나온 몇 사람이 함께 모이는 회의를 소집하려고 한다. 첫 번째 모임에는 그의 여자친구, 여동생, 이웃집 친구들 세 명, 대학 친구 한명, 사촌 한명, 반군사주의 운동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 한 명 그리고 지역주민 한 명이 참석을 했다. 이 회의에서 사람들은 거부자가 되기로 한 그의 결심과 동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올 결과들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시민불복종이나 비폭력, 직접행동, 반군사주의 등과 같은 개념이 낯선 사람들도 있어서 이것들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두 번째 모임에서 그들은 모임의 목표들을 정했다. 장시간의 브레인스토밍과 논의 끝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세웠다.

1) 정서적인 지원

'거부'씨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은 재판 이전 과정과 재판 당일의 재판정, 그리고 수감 기간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 아이디어는 버스를 한 대 대절해서 재판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두 실어서 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감옥에 있는 '거부'씨 면회를 가는 것과 사람들에게 응원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의 목적은 그가 느낄 고립감을 최소화 하고 사람들과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지원은 그의 부모님처럼 주변의 '거부'씨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2) 물적인 지원

재판 이전과 수감 기간 중에 '거부'씨는 여러 가지 물적인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재판 전에 구속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있는 동안 그가 필요로 할 여러 가지 것들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수감 기간 중에는 책이나 종이처럼 그의 공부를 위한 것들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지원들 역시 수감자 지원 그룹의 역할이다.

3) 대외적인 작업들

'거부'씨가 속해있는 그룹 'MOC'은 대외적인 작업들을 수행하게 된다. 'MOC'이 준비한 시위의 경우에는, 특히나 그 시위가 '거부'씨의 재판이나 수감과 관련이 있다면 그를 지원하는 그룹 사람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거부'씨가 속해 있는 공동체들(그가 사는 지역이나 대학)에서 선전작업을 진행하면서 '거부'씨나 다른 사람들의 시민불복종을 널리 알려내는 작업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메일 리스트를 만들어서 '거부'씨의 소식 뿐만 아니라 반군사주의, 전쟁세 반대운동, 평화 교육 등과 같은 관련 정보들을 공유할 수도 있다. 가끔씩 '거부'씨가 감옥에서 보내오는 편지들을 공유하는 활동도 필요하다. '거부'씨 지원 그룹은 'MOC'과 연락을 계속 하면서 (예컨대 'MOC' 회의에 한 명이 참여를 하는 식으로) 'MOC'과의 연계 속에 수감자 지원활동을 계속 해나갈 필요가 있다.

수감자 지원 그룹은 수감자 본인 뿐만 아니라 'MOC'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수감자 지원 그룹 멤버들이 'MOC'의 활동들에 함께 참여를 하면서, 이 운동에 새로운 사람들이 입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운동 단체와 수감자 지원 그룹 그리고 수감된 당사자 사이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서로간의 지속적인 의사소통이 중요할 것이다. 운동의 목소리는 감옥이 아닌 운동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운동그룹 그리고 수감자 지원 그룹의 지속적인 수감자 면회는 앞으로 운동을 지속해나가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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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대한 평가과정을 통해 우리는 행동의 경험을 유의미한 것으로 남길 수가 있다. 대개의 평가는 개인적인 감회나 친구들과의 대화, 활동을 준비하는 데 주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리더들')들과의 대화처럼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행사 이후 피드백을 거쳐 교훈을 남길 수 있는 하나의 평가 틀을 보여주고자 한다. 평가가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평가를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버리기보다는 준비된 하나의 틀 속에서 평가 역시 집단활동의 하나로 구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적인 평가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른 차원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던 참여자들이 모두의 노력, 경험, 헌신들을 공론화하고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에 참여 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행동을 기획하고 준비했던 사람들 모두는 이 평가과정까지 열심히 참여할 필요가 있다.

평가과정이 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잡게 됐을 때 구성원들은 행동의 과정이나 내용들에 대해 생산적이고 솔직한 피드백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명심할 것은 평가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들에 대해서 꼭 모두가 동의나 합의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에서 좋았던 점들, 아쉬웠던 점들 모두가 논의될 수 있어야하며, 단 가능하다면 행동의 긍정적인 부분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의 틀은 주의깊게 설계되어야 한다.

평가에서 다뤄지는 사안들 중에는 양적인 것에 관한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리플렛을 나눠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지, 얼마나 많은 보도가 되었는지, 도로를 얼마나 오래 가로막고 있었는지 등등. 만약 이와 같은 정보들이 평가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수치들을 계산하는 나름의 방식을 계발해서 이를 토대로 행동 과정에서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사람을 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때로는 이와 같은 숫자 놀이가 평가의 원래 목표와 멀어져버리는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 특히나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예를 들어, 앞서의 시위보다 이번 시위에 나온 사람들 숫자가 더 늘어났지만 실제로는 이 시위의 파급력이 줄어든다거나 처음 참여한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낀다거나 혹은 시위 자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예로는, 어느 군 부대 입구를 계획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가로막는 행동을 펼쳤지만 실제로 이 행동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며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기도 저하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요컨대, 평가의 기준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한 행사의 애초 의도했던 목표와 조응하여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에는 평가과정에 사용될 체크리스트가 제시되어 있다. 이 리스트는 다른 영역의 활동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1. 비전과 전략 그리고 구체적인 목표

행동에 대한 전반적인 비전/전략/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는가? 행동이 문제/갈등 상황과 연관이 되었는가? 참여자들은 누가 이 행동을 기획했는지 인지를 했던가? 참여자들은 전망/전략/구체적인 목표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2. 원칙과 규율

행동의 규율에 대한 명확한 논의 과정이 있었는가? 규율이 행동 과정에서 잘 지켜졌는가? 계획했던 구체적인 전략과 실제 수행은 규율에 부합했는가? 참여자들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다른 참여자가 합의를 기초로 구성된 규율을 따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느꼈는가?

3. 준비와 실습

준비/실습 과정은 적절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충분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도움을 주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는가? 참여자들은 준비/실습 과정에서 뭔가 배운 것이 있다고 느꼈는가?

4. 전술

계획한 전술은 적절했는가? 행동이 계획한 전술대로 진행이 되었는가? 전술은 참여자들의 필요와 기대를 충족시켰는가?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잘 대처했는가? 전술은 규율/전망/목표와 일치하였는가?

5. 조직

그룹 구성 및 조직과정은 이 행동의 목표/전략/비전/규율에 잘 부합하였는가? 그룹 구성은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는가?

6. 결과

1) 참여자

행동이 참여자들과 연관이 되었는가? 행동이 더 많은 참여자들을 불러모았는가? 참여자들은 행동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꼈는가? 행동이 참여자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는가?

2) 행동의 메세지를 전달받은 사람들

행동의 메세지는 명확했는가? 행동의 메세지가 목표에 도달했는가? 행동의 메세지가 더 많은 행동과 소통을 증대/감소시켰는가? 상대집단으로부터의 반응이 있었는가? 이와 같은 상대집단의 반응은 이 행동의 목표와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가?

3) 제3자 집단

그들은 이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였는가? 이 행동이 그들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많들었는가? 이 행동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왔는가?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에 따라 함께 움직였는가(중립적 입장, 관심표명, 입장선회)?

이 평가 폼은 1977년 7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열렸던 비폭력행동 트레이닝에 관한 국제세미나에서 계발된 것이다.

Other resources for e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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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행동들은 다양한 종류의 작업들을 수반한다. 그 중에는 가시적으로 들어나는 것도 있고 (예, 거리를 점거한 시위대나 언론담당자), 한편으론 덜 드러나거나 아예 잘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역할이라도 빠지면 효과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지기에 모든 역할들은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행동 준비과정에서의 역할들

행동 총괄자(코디네이터) 재정담당자 연구자 장소 관련 담담자 대외협력 담당자 (다른 단체와의 소통 및 조직) 물품 및 장비 담당자 모임 진행자 선전물 관련 담당자 언론 담당자 ('언론의 역할' 장 참조.) 방송장비 담당자 서기

행동 현장에서의 역할들

연행을 각오한 사람 (시민불복종 행위를 펼치는)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사람들 경찰과 소통 및 협상을 담당할 사람 행사진행 및 모니터 요원 경찰의 주의를 흐트리는 역할을 담당할 팀 언론 담당 대변인 언론 관련 실무팀 소통 담당팀 시위대/피켓팅을 하는 사람/구호를 외치는 사람/노래를 부르는 사람 리플렛 나눠주는 사람 비디오 촬영자 사진기사 의료지원팀 법률감시단 수감자 후원팀

행동 이후의 역할들

법률적 지원. ('법률적 지원' 장 참조.) 변호사 행동 관련 기록을 정리하고 문서로 만들 사람. ('캠페인 사례연구 가이드' 장 참조.) 비용 마련 담당자 대변인 탄원서 작성, 언론 기고 역할 담당자

인용 출처 : Rant Collective (www.rantcollectiv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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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사법체계는 각 국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활동가들이 연행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의 과정에서 '법률 지원팀'은 언제나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글에 제시된 법률 지원팀과 관련한 조언들은 영국에 기반을 둔 '활동가 법률지원 프로젝트' 팀의 보고서 첫째 장에서 많이 빌려왔다. (http://www.activistslegalproject.org.uk)

법률적인 지원은 효과적인 행동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법률 지원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보통 경찰서 주변을 서성이며 연행된 사람들이 석방되기까지 수시간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현장에서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한다거나 사진에 나온다거나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없다면 어떤 행동의 경우는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다. 아마도 법률지원팀이 없다면 '전선'에 있는 사람들 절반은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법률 지원 활동의 목표

행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 연행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돕기 연행된 사람들이 구금 중에 적절한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경찰 그리고 변호사에게 주지시키기. 연행됐던 사람들이 풀려난 뒤에는 감정적,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

법률 지원팀의 역할

법률 지원팀의 숫자는 행동의 규모나 예상되는 연행자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법률지원팀이 담당할 필수적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연행과정, 경찰서에 도착해서의 과정, 발생할 수 있는 폭력, 예측가능한 결과, 보석, 첫 심리공판 등에 관한 법률적 정보들이 나와 있는 소책자 제작 '경찰인권침해 감시카드' 제작 및 배포. (연행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처를 기재해놓는다.) 연행자들이 경찰서에서 법률 지원팀으로 거는 전화를 상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정하기. 정보 파악 : 현재 연행이 확인된 사람들의 소재와 연락처 그리고 석방 여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경찰서에서의 지원 : 각 경찰서에 유치된 연행자들에 대한 지원, 변호사들과 연락, 석방된 연행자들 만나기. 석방된 연행자들을 태우러 다닐 차량과 운전자를 섭외하고 석방된 연행자들이 잘 수 있는 곳을 준비해놓기. 행동이 끝난 뒤 피고인들의 대응회의를 꾸리기.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연행의 위험을 감수하는 법률(인권)감시단과 다르게 법률 지원팀은 어떤 순간에서도 연행이 될 만한 위험을 감수해선 안 된다. 유치장에 갖힌 법률 지원팀 요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대규모 집회에 필요한 법률 지원팀을 구성하는 것과 관련한 더 많은 정보는 다음의 미국 웹사이트에 있는 '법률 지원팀 구성하기'를 참고하자. ( http://www.midnightspecial.net)

더 많은 법률적 정보 및 워크숍과 관련해서는 '활동가 법률지원 프로젝트'(info@activistslegalproject.org.uk 또는 http://www.activistslegalproject.org.uk)에 문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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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대한 준비

가끔은 자신이 직접 발담그고 있지 않는 운동의 한 부분에 참여한다거나 혹은 단순한 집회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한시적인 행동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하나의 행동은 자신이 속한 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매번의 행동들은 우리 운동의 목표에 도달하는 중요한 과정들을 구성한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행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체크리스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동 계획 단계

권력분석하기

정세 판단 혹은 상황 분석하기. 준비과정의 큰 틀 짜기. 의사결정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 이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 설정하기. (예, 우리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상대 집단 설정하기,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이 행동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표 논의하기. (어떤 행동 혹은 행사를 할 것인지) 이 행동의 준비 단계와, 현장, 그리고 행동이 끝난 후 이렇게 각각의 단계에서 그룹의 목표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해 준비하기. 이 행동이 보여줄 비폭력적인 속성을 정의하기. (구성원이 공유하는 비폭력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문구로 명시된 원칙이 있는가?) 행동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여) 누가 이 행사 전체의 조율을 담당할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 행동을 종료할 것인지.

(보다 많은 아이디어들과 연습을 위해서는 캠페인에 관한 장, "효과적인 전략 개발하기" 및 "캠페인의 구성요소"를 참고하라.)

대외협력

다른 그룹이나 공동체와 함께 활동을 할 의사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그룹과 소통할 것이며 누가 소통을 담당할 것인가? ('우리편 찾기' 게임을 참조할 것.)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선전물을 뿌릴 것인가? 그렇다면 선전물 작업은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 행동에 관한 광고는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활동에 동참해달라는 메세지를 뿌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 작업은 누가 할 것인가? 언론 대응은 어떻게 할 것인지? 취재요청서를 미리 뿌릴 것인가? 현장에서 기자들을 상대할 담당자를 둘 것인가? 우리 스스로의 방송장비를 챙길 것인가? 언론 담당팀을 따로 만들 것인가? (언론에 관한 장 참조.)

참여자들의 준비

참여자들은 어떠한 활동들에 대해 준비할 것인가? 오리엔테이션이 있는지? 동아리를 형성하는 과정이 있는지? 비폭력트레이닝이 있는지? 기술 훈련이 있는지? 관련 법률에 대한 브리핑이 있는지? 참여자들이 행동의 시나리오를 결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참여자들의 사기는 어떻게 고양시킬 것인지? 논의과정은 모두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효과적인 행동을 위해 단순히 '직접행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자잘한 역할들이 있다는 것이 공유가 되고 있는지?

물품/장비 준비

행동이 예정된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계획은 잘 준비되었는지? 필요한 장비나 물품들은 다 준비되었는지? 장비들이 어떻게 배치될 것인지 계획이 되었는지?

행동의 현장에서

경찰과 소통을 담당할 사람에서부터 인권감시단, 언론담당자, 의료지원팀, 연행을 각오한 사람들과 이를 지원하는 사람들, 일반 시위대에 이르기까지 행동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역할자들 사이의 소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행동 준비단계에서부터 행동 이후까지의 역할 분담' 장을 보라.) 누가 카메라와 비디오로 행동을 기록할 것인가? 의사결정과정은 명료한가?

행동이 끝난 후

누군가가 연행이 되었을 때 이를 지원한 법률팀과 수감자지원팀이 있는가?('법률적 지원' 및 '수감자 지원' 장을 참고하라.) 행동에 대한 후속 언론 대응이 있는가? 오늘 있었던 행동과 관련하여 주류언론, 대안언론들에 뿌릴 자료들을 준비하고 있는가?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였는가? ('행동 평가' 장을 보라.) 이 행동에 대한 백서를 남길 계획이 있는가 (향후 사례연구와 관련하여)? ('캠페인 사례연구 가이드' 장을 참조하라.) 이 행동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행동이 우리 운동에 도움이 되었는가? 만약 이 행동이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면 이 행동이 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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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jken Sorensen

우리가 비폭력 행동을 취하는 대상들은 대개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들일 때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유머와 비폭력 행동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뭔가 어색해 보이기에 우리의 고려대상에서 제외되곤 한다. 하지만 유머와 진지함은 겉보기와는 달리 생각보다 훨씬 더 서로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유머는 뭔가 모순된 상황이나 부조리한 상황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비폭력 행동 역시 지금의 부조리한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사이의 괴리를 드러낼 때 큰 힘을 발휘하곤 한다. 유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또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논리와 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만약 유머감각이 당신에게 쉽게 생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유머감각은 학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상대집단을 잘 지켜보아라. 그들이 말하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것 사이에 괴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센스있는 농담을 위한 좋은 기초가 될 것이다. 상대 집단이 말하는 것과 실제로 보여주는 것 사이의 모순을 관심있게 지켜볼 수록 유머는 더 잘 작동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독재자들은 자신들이 '공익'을 위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와 같은 그들의 말들은 그들이 실제로 보여주는 모습과는 반대될 때가 많다.

유머를 지혜롭게 활용하는 법

과도한 유머는 자제하자. 유머는 숙고를 거친 후에 던져져야 한다. 진지한 메세지가 담긴 유머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조롱하고자 하는 대상은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하자.

예컨대, 지금 행동을 통해서 특정한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준비하는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유머의 소재를 상대방의 복장이나 말투, 성별에서 찾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재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보다는 오히려 전달하고자 했던 원래의 메세지의 위력을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머가 원래 전달하고자 했던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자. 이 글의 마지막에는 유머가 특정 행동의 주장과 목적에 잘 부합했던 두 가지 사례들이 제시될 것이다.

유머를 활용하는 이유

우리의 행동들에서 유머는 약방의 감초처럼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머는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유머는 만병통치약까지는 아니더라도 활동가들의 진이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또한 유머는 언론이나 잠재적인 지지자 그리고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기자들이 우리의 취재요청서를 받아들었을 때 현장에서 좋은 이미지와 사건이 될만한 것들을 건질 수 있겠다 싶으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작은 운동을 좀 더 확대시키고자 할 때, 유머는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 않는 잠재적인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지금 심각한 주제로 싸우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즐기며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유머의 힘

유머는 상대집단과 마주했을 때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상호 대치 속에 형성된 팽팽한 긴장의 끈을 가볍게 비틀어주는 행동들은 상대집단과의 관계나 진지하기만 하던 논리 싸움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유머는 그들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나의 '딜레마'적인 상황을 안겨다주는데, 즉 이제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들이 져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상황을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그들이 수세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상대방 중 누군가를 당혹스럽게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거친 반응에 대해서는 미리 잘 준비를 해야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때, 이 때 발생할 그들의 좌절감은 오히려 폭력적인 대응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머가 힘을 발휘한 행동의 사례들

아래에서 보여 줄 사례들은 앞서 기술한 논점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례들을 다른 곳에서 다시 그대로 시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아래의 사례들이 유머가 힘들 발휘한 좋은 사례들이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맥락과 상황이 이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1983년 노르웨이에서는 여러 명의 완전거부자들이 주축이 되어 '징병제 반대 운동(KMV)'이라는 그룹을 만들고 병역과 대체복무 모두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완전거부자들에게 16개월 감옥행을 기계적으로 선고하는 법을 바꾸고자 했다. 한편, 당시 노르웨이 정부는 '감옥'이라는 표현 대신 완전거부자들이 '행형기관에서 감독 및 관리를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서는 정치범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범에 대한 재판이나 수감, 처벌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거부자들의 경우에는 법원에 가서 완전거부자라고 판정을 받고 일률적으로 16개월 형을 선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해당 검사가 재판정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완전거부자들에 대한 재판결과는 암묵적으로 늘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징병제 반대 운동' 그룹에서는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저항을 했다.

한 명의 활동가가 검사 복장을 하고 실제 재판에 참석해 검사의 노릇을 그대로 수행했던 것이다! 검사로 위장한 그 활동가는 재판정에서 피고의 직업(당시 재판을 받던 완전거부자의 직업은 변호사였다)을 고려했을 때 16개월이 아닌 그 이상의 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지만,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이 검사의 '오버 액션'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징병제 반대 운동'그룹은 몰래 촬영한 이 재판정의 모습을 언론에 공개했고 이는 대부분의 노르웨이 시민들의 실소를 유발하였다.

위와 같은 사례는 문제제기 하고자 하는 상황을 비꼬아 보는 것이 가지는 파급력을 잘 보여준다. 당시 재판을 받던 한 완전거부자의 친구가 검사로 위장을 해서 더 가혹한 형벌을 줄 것을 주장했던 이와 같은 패러디가 완전거부자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기계적인 처벌만을 일삼던 사법부를 제대로 조롱한 셈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후 많은 언론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패러디는 노르웨이 정부가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 사이의 모순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정치인들은 노르웨이가 민주주의 국가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양심수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와 같이 감옥에 보내지는 양심수들을 '수감자'가 아니라 '행형서비스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기만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징병제 반대 운동' 그룹은 유머라는 수단을 통해 정부 스스로가 만들어낸 논리로 점철된 그들의 기만을 조롱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정부가 주장하는 논리의 앞뒤가 안 맞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사례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유효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검사로 위장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다른 상황, 맥락에서 그대로 흉내냈다간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였던 노르웨이의 사례에서 논의를 옮겨서 이번에는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던 세르비아에서 2000년에 있었던 사례를 들어보겠다. 한번은 밀로세비치가 농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있는 모든 가게와 공공장소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사람들에게는 1 디나르(세르비아 화폐단위)씩을 기부해줄 것을 명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청년 그룹 '오트포(Otpot)'에서는 “'Smenu'를 위한 한푼”이라고 쓰여진 자신들만의 모금함을 만들어서 똑같이 설치를 했다. 세르비아 단어인 'Smenu'는 변화, 사임, 해고, 연금 혹은 숙청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트포' 는 자신들이 만든 모금함 옆에 밀로세비치 사진이 붙여진 통을 하나씩 메달아 놓고 사람들이 모금함에 돈을 넣으면 옆에 메달린 통을 한번씩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캠페인은 세르비아 곳곳에서 여러 번씩 반복되었는데, 한번은 자신들의 모금함에 문구를 써놓길 만약 밀로세비치의 정책 때문에 한푼도 못가진 사람들은 모금함 옆에 있는 통을 두번씩 치도록 하였다. 경찰이 이 통을 압수했을 때, '오트포'는 바로 보도자료를 내어서 경찰이 자신들의 통을 압수했으며 이로써 자신들의 모금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밝혔다. 즉, '오트포' 자신들이 밀로세비치의 은퇴를 위한 충분한 돈을 모금했으며, 경찰은 그 돈을 밀로세비치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바로 글 초반부에 언급했던 '딜레마'의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제 밀로세비치와 경찰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만약 그 통을 압수하지 않고 다시 돌려준다면 자신들의 체면을 잃게 되는 셈이고, 그게 아니라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고 경찰 집단은 밀로세비치의 은퇴를 위해 모금된 돈을 직접 전달한다는 조롱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이 게임에 한정해서는 그들이 진 셈이다.

아래의 코벤트리 대학 평화학 센터(the Centre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Studies) 웹사이트에 가면 유머와 비폭력의 관계에 대한 마이켄의 논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the website of the Centre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Studies, Coventry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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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로버타 베이직(Roberta Bacic, 클렘 맥카트니Clem McCartney의 도움을 받았음)

들어가며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보통은 우리가 반응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게 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하고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반응하여 행동하고 저항하며 변화를 도모하게끔 자극을 준다. 우리 행동의 원동력인 이러한 현실은 우리 자신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또한 타인의 문제일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행동들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우리는 운동의 결과로 우리 스스로의 힘을 배양하는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우리 스스로를 좀먹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운동의 과정에서 맞닥뜨릴 예상치 못한 감정들과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활동의 과정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들

활동을 통해 대외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알려낼 결심을 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맞닥뜨리고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상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보통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들에 직면하게 된다. 불안정하고 불투명해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보통 체포에 대한, 혹은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고문, 불법집회에서 연행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배신을 당하는 두려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만약 연행이 된다면 어떡하지?), 전화 위협이나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활동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러한 감정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든 혹은 잘 대처하기 위해서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노하우를 알아야 한다. 자신감/동지애, 잘 준비된 트레이닝, 감정적인 준비/공유의 이 3요소는 이와 관련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준비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상황들

'''1. 두려움에 직면하기 '''

우리의 활동으로 인해 우리가 직면해야할 트라우마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곧잘 연행, 구속, 구타와 같은 신체적 폭력이나 다른 인권침해 사항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다른 사회보다 이러한 위험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특히나 국가의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사용되는 곳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공권력이 특별히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물론 사람들은 약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육체적으로 가해질 고통과 불편함에 대해 일정한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감정들은 우리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감정들을 무시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감정들을 대면했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들은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든다. 예를 들어, 비폭력행동의 현장에서 급박하게 달려야 하는 상황이 닥쳤는데 다른 대처 방식에 대한 준비가 없이 단순히 사람들을 따라 뛰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규율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고 경찰은 이 때를 노려 공격을 해올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측 가능한 상황에 대해 논리적, 그리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나 트레이닝 과정에서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연습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두려움 극복하기 활동 참조.

2.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힘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기존의 지배적인 여론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과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중 앞에 서서 주장을 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행동은 국가에 맞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여론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기존의 사회 통념 혹은 주장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행동이 좀 더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침묵의 증언자가 되어 서 있는 '위민인블랙(Women in Black)' 소속 활동가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증언자라는 형태의 행동은 이제 세르비아나 콜롬비아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출현하고 있다. 이 경우에 다른 동료와의 연대감은 특히나 더 중요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연대감은 우리가 내면에 지니고 있던 다른 감정들을 좀 더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그들이 인정하고 맞닥뜨려야만 하는 내면의 불안감들을 가지고 있다. 갈등상황 역할놀이 활동 참조.

'''3. 심리적 고통에 맞서는 연습 '''

다른 위험이나 결과들은 좀 더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더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방관자들이나 공권력을 접하면서 때로는 조롱과 경멸, 굴욕감 혹은 짜증의 감정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서 다시 앞서 언급한 '위민인블랙'의 사례를 보자. 침묵의 증언자로서 활동가들이 서 있을 때 성난 대중들은 그녀들에게 침을 뱉거나 욕을 했지만 그녀들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일체의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에게 심리적으로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트레이닝의 하나인 '롤 플레이'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에서 겪게 될 감정들을 미리 경험하는 한편 나와 마주하게 될 상대의 느낌과 두려움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 하자면, 비폭력행동에서 자신감과 함께 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은 매우 중요한데 이러한 감정들은 실제 행동 이전에 리허설을 미리 해보는 과정에서 강화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 그룹이 맞닥뜨릴 좋지 않은 여론들은 앞서 기술했던 감정들보다는 좀 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여론은 당장 행동의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행동에 대해 왜곡 혹은 비방 보도를 하는 일부 언론 때문에 우리의 원래 의도나 동기가 잘 전달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와 같은 일련의 굴욕감이나 모욕감에 대해 스스로 준비를 잘 한다면 실제 맞닥뜨렸을 때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대 집단의 역할을 경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느낌들

종종 시위대들이 길거리 연극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 집단이 행하는 역할을 재현해야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때 상대 집단 역을 맡은 사람들은 굴욕감과 같은 예측하지 못한 감정에 휩싸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많은 그룹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과 그 곳을 지키는 경비대의 역할을 재현하는 길거리 연극을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이 연극에서 '수감자' 역을 맞은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한편 '경비대'역을 맞은 사람은 그 역에 너무 몰입해버린다거나 혹은 극도의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수감자'역이든 '경비대'역이든 그 때 발생하는 감정들은 퍼포먼스를 하는 당사자들에게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참여자들은 미리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또 퍼포먼스가 끝난 뒤에는 서로의 감정을 털어놓고 공유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 좋다. 또 다른 사례는 공장식 농장에 항의하는 행동으로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 도살된 고기를 상징하는 시위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시위참여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통해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대신에 그들 스스로가 만든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5. 환멸 혹은 회의감 '''

가끔은 행동 현장에서보다 비폭력행동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행동이 끝난 후에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바로 우리의 행동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2003년 2월 15일 일어난 대규모 이라크 전쟁 반대시위는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이 때 우리의 회의감은 강렬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자각을 하면서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들은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과연 우리의 시위는 의미가 있었을까?” 이러한 회의감 때문에 그들은 그 다음에도 계속 있을 반전시위나 혹은 다른 행동들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환멸 또는 회의감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행동이 있을 때마다 끝나고 난 뒤 그 행동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고 평가를 하면서 이 행동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평가' 페이지 참조) 우리는 우리의 기대수준을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 자체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6. 상대 집단의 예상치 못한 환대에 대처하는 법 '''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안 좋게 끝난 상황도 문제지만, 한편으론 역설적이게도 상황이 긍정적이거나 성공적으로 보일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공권력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대응을 하고 권력자들이 우리의 요구를 고려하고 수용할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우리는 삼엄한 대치상황만 준비했지 이처럼 예측과 다르게 상대쪽에서 너무나 쉽게 나와버릴 경우에 대해서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긴장 속에서 발산된 우리 몸 안의 아드레날린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시스템을 좀 더 신뢰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지금 그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운동은 보통 공권력의 강력한 대응에 맞서 더 단결하게 되고, 반대로 그러한 압제가 없으면 오히려 운동의 힘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서의 사례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를 분석하고 연습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실제로 그런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우리는 좀 더 적절하게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7. 우리 안의 호전성이 강화될 때 대처하는 법

비폭력행동의 과정에서 상황이 격렬해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상황을 다들 한번씩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호전성은 단지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경찰들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특히나 그들이 우리를 과격하게 대할 때 분노는 치밀어 오른다. 설령 우리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우리 안에 어느새 자리잡은 공격적인 감정은 우리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한다. 때로는 내가 아니라 다른 시위대들이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적절하게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격렬해진 그들과 함꼐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현장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원래 계획대로의 행동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런 상황에선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들에 대해서도 미리 트레이닝의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현장에서 빠른 의사결정을 도울 수 있는 소통방식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 및 '롤 플레잉' 활동 참조)

서로 다른 맥락에 대한 고려

북반구 지역에 한정해본다면, 우리는 보통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국가 혹은 문화권 속에서 시위를 벌이게 될 것이다. 혹은 권위적인 체제 하에서 시위를 벌일 수도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꼭 시위를 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 중에서 유독 시위대들에게 거칠게 대응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요소들도 가능한 행동의 선택지나 한계를 논의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그 사회가 얼마나 개방되었는지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폐쇄적인 사회의 경우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반체제인사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될 수도 있고, 그에 대한 책임소재도 전혀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나라에도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법시스템을 통해 인권 침해와 같은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한편 한 사회의 문화도 중요한 변수인데, 예컨대 어느 문화권에서는 국가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사회에서는 근대화에 대한 압력이나 타국으로부터의 압력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곳들에서는 시위나 데모가 국가에 대한 반역이나 파괴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결론

우리가 비폭력행동의 과정에서 겪게 될 반응과 감정들에 대해 미리 잘 준비하고, 참여자들 사이의 신뢰감을 높이는 한편, 우리 행동이 가져올 결과들에 대해 분석하는 논의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싸움을 좀 더 지혜롭게 지속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것들이 우리의 일생 안에 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에서 맞닥뜨릴 문제들에 대해 잘 대비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운동은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용기를 잃고 포기를 하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는 주류적인 시위방식이나 무력의 사용처럼 비생산적인 시위방식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좀 더 효과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없이 단지 머릿수만 따지는 시위를 계속하게 될 지도 모른다.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속하는 투사로 보일지 몰라도, 이러한 운동은 하는 것은 원래의 목표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우리의 아까운 에너지만 좀먹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모하고 맹목적인 시위는 다른 사람들의 참여의지를 저하시킨다. 만약 우리가 불의에 맞서 행동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 행동에 대해 잘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의무라고 본다. 그 준비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의 과정에서 맞닥뜨릴 물리적인 위험성과 감정들의 반응에 대해 미리 준비하여 잘 대처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운동이 우리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며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운동의 과정에서 즐겁게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평화에 기회를 열어두자. 우리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I-NRriHlL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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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트레이닝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은 다양한 임무들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 임무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캠페인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떤 트레이닝이 필요한 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트레이닝이 필요한 분야가 캠페인 전술 개발인지 젠더 감수성 부분인지, 비폭력 행동에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들을 익히기 위한 것인지, 소규모의 동질그룹이라도 집단 상호과정에서 트레이닝을 필요로 하는지.

트레이닝을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면 트레이너들이 필요하게 된다. '비폭력 트레이닝'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만약 트레이너들이 없다면 트레이닝을 진행하기 위해서 공동진행자 팀을 조직하라. 이 장은 트레이닝 조직, 기획 및 진행을 돕기 위한 체크리스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트레이닝의 조직자들과 트레이너들은 그들 각자의 임무들을 진행시키기 전에 함께 모여서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트레이너와 조직자들 사이에 불명확한 점 혹은 그럴 것이다는 식의 가정들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트레이닝의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다. 트레이닝은 그룹의 행동계획을 시험해보고 그룹 내 약점을 찾거나 혹은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트레이너는 이러한 목표들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트레이너가 조직 내 멤버라면 트레이너로서 그들의 역할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들이 맥락, 조직, 캠페인, 행동 시나리오 기타 등등을 조직외 진행자 혹은 트레이너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면 다른 역할을 시작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

'비폭력 캠페인들' 및 '효과적인 비폭력 행동을 위한 준비' 장은 트레이너와 조직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훈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정보를 담고 있다.

Placheolder image

세르비아 청년그룹 오트포(Resist 저항하다)는 1998년 창립 이래 2년 만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를 실각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처음 오트포 캠페인의 목표는 反밀로세비치 투쟁의 방식을 쇄신하는 것, 이를테면 시민들과의 의사소통 방식에 있어 비폭력 '게릴라' 전술(그라피티, 거리공연 등)을 사용한다든가 대중적 관심을 증대시키고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유머를 사용한다든가 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후 점차적으로 오트포 캠페인은 분열된 야당에 압력을 가하고 밀로세비치에 대한 대항 및 '그 권력의 기둥'을 무너뜨릴 요소들을 찾기 시작했다.

비폭력트레이닝 워크숍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현 정권을 약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결국 밀로세비치가 부정선거를 획책했을 때 오트포는 이를 폭로하고 중단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군중들이 의회 건물을 포위했을 때 경찰은 그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인 불도저가 의회로 진입할 당시 경찰은 이것을 막을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밀로세비치는 사임하였다.

오트포는 세르비아 민주화를 위한 의미 있는 진전(밀로세비치의 제거)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나 민주화를 위한 그 이후의 과정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참고자료:

'독재를 타도하다(Bringing Down a Dictator)', DVD, 60분, 요크 짐머만 주식회사(York Zimmerman Inc.) 작품, 미국, 워싱턴 Albert Cevallos,'불도저는 어디로 향하는가? 세르비아의 비폭력 혁명과 민주주의로의 전환 (Whither the Bulldozer?: Nonviolent Revolution and the Transition to Democracy in Serbia)' (미국평화연구소(US Institute of Peace) 특별보고서 제72호 - http://www.usip.org 이 주소로부터 다운로드 받을 수 있음.) Centre for Applied NonViolent Action & Strategies 웹사이트. 오트포 및 다른 활동가들이 그들의 전략 및 전술에 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http://canvaso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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