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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명 :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인지적(gender-aware) 대화 소요시간 : 30-45분 활동의 목적: 평화단체 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화의 기회를 갖기 위해. 평화단체에서 발생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평화단체 안에서 좀 더 편안하고 헌신적인 수준의 젠더 관련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활동 방식 / 촉진자가 유의할 점 :

I. 젠더, 갈등 그리고 평화구축에 관한 소그룹 토론

1. 남녀 혼합의 소그룹으로 나눠 여성과 남성이 갈등과 폭력 상황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방식에 대해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2. 다음에는 여성과 남성이 평화활동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방식에 대해 논의하고 리스트를 만든다. 3.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각 소그룹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질문한다.

II. 전체 참가자를 남성들끼리 그리고 여성들끼리 각각 구성된 소그룹으로 나눈다

1. 각각의 그룹들에서는 그동안 평화 관련 활동을 하면서 다른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2. 각각의 그룹들에서는 평화 관련 활동의 과정에서 다른 성과 함께 활동을 할 때 필요한 전략들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 논의가 끝나면 각 그룹에서의 논의 내용들을 공유한다. - 남녀 한명씩 짝을 지어서 앞서 공유된 내용들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말을 하되 한 사람이 말을 하는 동안에 상대방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열심히 경청을 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 활동은 (리사 셔크 편)에서 차용되었다. 다음 인터넷 주소에서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볼 수가 있다. http://www.iiav.nl/epublications/2004/womens_peacebuilding_manual.pdf or at http://www.ifor.org/WPP/resourc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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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bspotting Edited version

By Roel Stynen

1996년 7월 8일, 국제 사법 재판소는 “핵무기의 사용 혹은 핵무기를 이용한 위협은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은 평화 운동 내에 논란을 불러오는 한편 핵무기에 반대하는 직접행동이나 시민불복종 행동들에 법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벨기에에서는 소규모의 시민불복종 행동 그룹들이 핵무기 그리고 무장해제라는 법적인 의무를 환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나토의 본부와 클라이네 브로겔(Kleine Brogel)에 있는 공군 기지 앞에서 폭탄을 더럽히는(Bombspotting)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폭탄에 때 묻히는 행동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첫번째 직접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이 행동을 준비했던 기획자들은 사람들이 준비과정을 길게 갖지 않고도 직접 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각 활동가들이 지역의 그룹과 접촉할 것을 독려하고, 비폭력 직접행동 트레이닝들을 열심히 준비하는 한편 트레이닝에 '전문적인 활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게끔 준비하였다. 이는 폭탄에 때 묻히는 행동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부담없이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자하는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이 우리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기 위해 택한 방식 중 하나는 지역 모임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양한 삶의 궤적들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이러한 지역 모임들은 핵무기와 관련한 이슈들과 핵무장 해제를 위한 직접행동에 대한 요구들을 거리로 들고 나왔다. 지역 모임에서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중앙 사무실에서 전국적인 운동을 기획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지역 모임들과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지역에서든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적인 사람들이 존재하며 지역 모임의 활동가들이 이들과 직접 만나며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에 걸친 시간동안 우리는 다른 국가의 활동가들을 우리 활동에 초대를 해왔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주었다. 나토 소속 국가의 정부들에 압박을 가하는 것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운동을 진정으로 국제적인 행사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지역의 활동가들이 우리로부터 배울 수 있을 만한 노력과 논의들을 지속해왔다.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을 우리 운동에 초대를 하게 되면 당장 음식이나 숙소, 회의장, 교통편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국제 참가자들이 논의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데에 밑바탕이 되는 모든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한다. 언어 문제도 중요한데, 예컨대 해당 활동가의 국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사람이나 해당 활동가에게 법률적인 지원을 담당하는 사람은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제 참여자들은 행사가 벌어질 지역에 도착해서 그 곳에 익숙해지고 행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행동 준비과정에서 우리는 국제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행동에서 어떤 역할들을 맡을 것인지를 조율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그들이 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또한 행동을 함께 준비하기 위해서 국제 참여자들과 미리 만나 회의를 하는 것도 고려를 한다.

'파슬레인 365일 운동 패키지(Faslane 365 Resource Pack)'은 이와 같은 목적(옮긴이 주, 국제적 단위 행사의 효과적인 준비)을 위해 고안된 훌륭한 소책자이다. 이 소책자에는 1년에 걸쳐 펼쳐진 파슬레인(옮긴이 주, 트라이던트 핵미사일이 있는 기지) 봉쇄 운동의 목적과 정치적인 맥락에 대해 기본적인 소개가 되어있고, 이 운동에 참여하는 그룹들이 준비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될 참여자 조직에서부터 전술, 트레이닝 등의 주제에 관한 실질적인 조언들이 담겨져 있다.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국제 참여자들과 함께 진행한 비폭력 트레이닝은 매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트레이닝을 통해 우리는 행동 시나리오들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해볼 수가 있고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는 문제들에 미리 준비할 수 있다. 혹자는 해외로 나가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가 속한 지역의 운동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해외에 나가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며 비용만 많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외로 나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운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해외 활동가들을 만나는 것은 앞으로 언젠가 함꼐 활동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한번은 프랑스 그린피스 소속 활동가들이 우리 활동에 참여를 했다가 자극을 받아 돌아가서 프랑스의 신형 핵미사실 개발에 반대하는 행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M51 미사일에 반대하는 첫번째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9월에는 약 서른 명 정도의 '폭탄에 때 묻히기' 소속 활동가들이 프랑스 보르도 근처에 있는 로켓 발사 실험 연구소(the Centre d'Essaies des Landes)에서 펼쳐진 '폭탄에 때 묻히기' 스타일의 첫번째 시민 감시 행동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행동 준비를 위한 조언과 지원을 제공했고 그 행동이 있은 뒤에는 수개월에 걸쳐 '트레이너를 위한 트레이닝'을 제공하였다.

물론 해외에서의 활동이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의 활동을 대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해외 활동가들을 초청하는 것이 원래의 운동에 어떤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반대로 해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 운동에 어떤 결과를 미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국제적인 차원의 활동이 갖는 장점을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2005년에는 벨기에의 핵무기 관련 시설이 배치된 네 곳에서 시민 감시 행동을 하는 'XL 미사일에 때 묻히기' 행동이 열렸는데 그 당시 활동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의 출신 국가는 나토의 핵무기가 배치된 나라들(영국, 미국, 이탈리아, 독일, 터키, 네덜란드)과 다른 나토 가입국들(핀란드, 프랑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활동가들의 다양한 출신 국가에 대한 내용을 보도자료로 돌렸고, 각국 대표로 참여한 활동가들은 그들의 언어로 된 보도자료를 자국에 따로 돌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다 보면 이제 문제가 단순히 해외 활동가들을 초청하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것 이상으로 커진다. 언론 교섭이나 행동 전후의 과정에서 역할을 나누는 과정의 사례처럼 예전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You can read a longer version of this article at: Bombspot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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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en Dario Pardo Santamaria

적대로 얼룩진 역사

비폭력 저항을 저해하는 조건 속에서 산 호세 드 아파르타도의 평화마을이 1997년에 설립되었다. 이 평화마을은 위치한 지역은 콜롬비아에서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걸려 있으면서 게릴라(the FARC)들과 공권력 그리고 준군사조직(보통 국가와 한패거리임) 사이의 무장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우라바(Uraba) 지역이다. 우라바 지역에서는 그 동안 평화마을의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테러와 암살, 위협 들이 자행되어 왔다. 평화마을 자체는 자신의 원래 거주지에서 쫓겨난 사람들, 폭력에 희생된 세대의 후손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평화마을은 그 동안 평화마을을 깎아 내리려는 정부 고위층과 언론들의 집중 공세를 받아왔다. 이는 특히나 알바로 우리베(Alvaro Uribe) 정권에서 심하게 행해졌다.

그 동안 국가의 공권력이나 준군사조직 혹은 게릴라집단(FARG)에 의해 15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현재 평화마을에는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시민적 저항의 전략을 위하여

거주지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급박한 노력에서 출발된 사업이 이제는 하나의 프로젝트 사업이 되어서 현 사회에 대안적인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전쟁과 강제추방에 저항하는 것, 무장갈등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시민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망을 확립하는 것. 마을 결속력의 지속가능한 토대를 만드는 것(사례:총체적이고 생태적인 차원의 경제적 대안을 계발하기) 폭력의 사용을 부정하는 동시에 무장갈등에서의 정치적인 협상을 통한 해결을 지지하는 것. 이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수준 뿐만 아니라 일상 수준의 평화와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 평화 존(zones of peace)이라는 아이디어를 확산시키고 다른 지역의 마을들도 평화마을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

경제적 차원의 전략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서는 기본적인 생필품 수급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평화마을에서는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독자적인 농장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평화마을에서는 '공정 무역' 그룹과의 연계를 통해 코카 잎과 베이비 바나나를 경작하고 있다. 그리고 모임이나 코스(농부 대학 혹은 저항의 대학이라는 이름으로)를 개설해서 생태적 경작 방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정책적 차원의 전략

평화마을의 출현은 그 동안 토지를 지배하려고 했던 세력들, 특히나 군대와 준군사조직 그리고 게릴라들과 같은 모든 무장 주체들에게 하나의 급진적인 도전으로 여겨졌다. 생존을 위해서 평화마을은 한편으로는 평화마을에 가해지는 압력들을 경감시킬 수 있는 관계들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국가간의 차원의 연대를 통해 마을의 회복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관계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마을 결속력

평화마을의 설립선언문에는 마을의 기본 원리로서 탈군사화와 중립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 선언문에 서명을 하는 것은 집단의 응집력을 돋우는 효과를 낳는다.

트레이닝은 평화마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평화마을을 만드는 작업의 과정에서 거주지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향후 구성원이 될 사람들이 참여한 워크샵들이 있었다. 현재 트레이닝 위원회 내부적인 차원에서는 마을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시민불복종 과정 전체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면서 마을의 기본 원리에 대한 성원들의 이해와 헌신을 강화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트레이닝에서는 마을 안에서의 갈등해결기술에 대해 다루고 마을 주민들 중 어느 누구도 군대에든 무장그룹에든 앞으로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는 것을 돕는다. 트레이닝 위원회는 가족들, 코디네이터들, 마을의 워킹 그룹들 뿐만 아니라 부근 지역에 있는 다른 가족들과도 활동을 함께 하였다.

방어를 위한 전략

평화마을은 마을 주민들에 대한 인권침해의 위협을 줄이고 시민 불복종의 과정을 강화시키기 위한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이 활동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무장 주체들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을 비난하고 동시에 그 폭력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마을의 기본 원리들을 적어놓은 현판들을 걸어 놓음으로써 마을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 소규모 출판작업들, 비디오, 이 지역 문제에 관한 전국적/국제적 회의, 국내/국제 투어, 자체 웹사이트 등을 통해서 마을에 관한 정보들을 전파하는 것. 정부나 국제기관에 청원을 넣는 것. 가끔씩은 이들로부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미군의 원조에 대한 제재 결정이나 2005년 2월 마을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군인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던 경우가 있다. 다른 단체로부터의 지원 : 국제평화여단(Peace Brigades International)이 정기적으로 마을에 교통수단을 제공해주고 있고, 미국의 화해친우회(Fellowship of Reconciliation)에서는 학교와 같은 마을의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새로운 중립지역(New Neutral Zones)에 대한 제안

서로 대치하고 있는 양 군대 사이에 맺어지는 '안전한 지역'에 관한 협정과는 다르게 평화마을에서는 무력충돌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한 곳 마련하기로 했다. 평화마을은 날아드는 총알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을 넘어서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평화마을에서의 삶은 존엄성과 자율성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다.

압제에 저항할 수 있는 힘

산 호세 드 아파르타도의 평화마을은 그 동안 콜롬비아에서 정치적인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었다. 마을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의 목표는 평화를 선택한 사람들의 신념과 원리를 무너뜨리고 불신과 위협을 조장하며 개인적/집단적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산발적인 행동들과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 자행된 억압들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위협감과 불신감을 조장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다.

평화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자행되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 마을에서 쫓겨나면 더 이상 갈곳이 없는 사람들의 존재기반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평화마을의 저항의 근거에는 이보다 좀 더 긍정적인 요소들 역시 존재한다. 정치적인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 독자적 주체로서의 강한 사회적 양심, 상대의 무력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과정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믿음, 비폭력이 생존에 좀 더 유리한 가치라는 확신,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면서 지켜왔던 투쟁을 결코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양한 층위의 저항

평화마을의 저항은 다음처럼 다양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말라리아와 빈곤, 기본적인 물자 수급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법적 그리고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무장 그룹의 테러에 대한 저항 무장단체에 가입하고픈 욕구를 부추기는 (상대에 대한) 복수심을 잘 다스리는 것 사회에 만연한 과도한 권위주의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발전가능성에 근거한 총체적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노력

결론

지난 10년 간 산 호세 드 아파르타도의 농민들이 비폭력 저항을 지속해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카톨릭 교구들의 동참 주민들의 소속감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된 마을의 민주적이고 유연한 조직구성 예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향상된 여성과 아동들의 삶의 조건 강력한 내적 규제, 합의된 사안에 대한 존중, 중립성과 비폭력이라는 근본 원리들에 충실한 점 방어를 위한 마을의 독자적인 수단을 도입한 점 정부 측과 협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점 마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을 마련한 점 콜롬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행해진 경험들과 시민적 저항의 행동들을 벤치마킹하고 그것들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 낸 점. 새로운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다른 이들에게 지속적인 저항의 동기를 마련해준 사람들의 존재 국제적 차원의 연대와 그들의 지원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점진적 확대 마을 주민들의 강한 정신력 그리고 무장 그룹의 폭력에 직면했을 때 주민들이 보여주는 빠른 회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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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한국의 운동사회 속에서 ‘비폭력’이라는 개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여전히도 ‘비폭력’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유약하고 수동적인 운동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운동역사가 가지는 특수성이기도 하다.

한국은 일제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로 30여 년간 군부독재정권이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으며 저항세력도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독재정권들의 폭력적 억압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점점 더 강해지는 국가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많은 민중들이 ‘저항폭력’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국가폭력에 직접적으로 맞서게 된 것이다. 

여전히도 한국에서는 경찰들의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경찰폭력에 의해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저항폭력’의 힘을 믿고 있으며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폭력을 전면 부정하는 ‘비폭력’은 여전히도 받아들이기 힘든 운동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운동방식은 ‘평화’, ‘비폭력’이 가지는 특성대로 아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한국운동사회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러한 ‘비폭력’운동방식은 그동안 폭력적 운동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미 1980년대 전방입소 반대투쟁, 군인과 전경들의 양심선언, 1990년대 불심검문 반대투쟁 등 비폭력저항의 방식들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단순히 비폭력을 투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삶의 철학으로서 비폭력주의를 받아들이는 평화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 병역거부자들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병역거부운동은 뼛속까지 국가화 되고 군사화 된 한국사회에서 양심적 시민이라면 양심에 거리끼는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내고 군대, 무기, 전쟁 등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해 볼 것을 인간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였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러한 병역거부 운동의 호소에 더욱 큰 무게를 실어주었다. 총을 드는 대신 1년 6개월의 감옥행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현재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법률적, 심리적 상담을 제공하고 기자회견, 토론회, 캠페인, 직접행동 등 각종 활동을 통해 병역거부의 의의를 알려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병역거부자들의 수감 전후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고 있다. 병역거부는 병역을 거부하는 순간 개인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 크고 또 이들의 숫자가 사회적으로 매우 소수이기 때문에 이들이 결코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병역거부 운동의 확산과 함께 이러한 비폭력평화주의에 동조하는 그룹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고 최근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에서 기존의 전통적 투쟁방식과는 사뭇 다른 투쟁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평택에서 ‘평화마을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며 정부와의 협상 끝에 비워진 집들과 마을을 도서관, 찻집,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문화예술인들의 주도 하에 마을 전체를 각종 설치물과 벽화가 가득한 평화촌으로 가꿔나가기 시작했다. 또 올해만 해도 몇 차례 진행된 정부의 강제철거에 맨몸으로 마을 입구를 봉쇄하고 포크레인을 막아서는 등 비폭력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비록 주류 미디어에서는 이러한 투쟁에 대해 침묵했지만 진보적 매체를 타고 평택의 투쟁은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졌고 동조를 이끌어내었다.

아직까지는 이들 운동에 비폭력주의가 중심적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병역거부 운동에서는 이러한 평화주의자들이 주류의 흐름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군인 강철민 씨 투쟁의 경우 농성 중 파병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던 운동집단과의 활동방식의 차이에 따른 마찰이 있기도 했고 학생운동 그룹에서 대거 예비병역거부를 선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모두 병역거부 운동을 다른 운동의 목적(파병반대)을 위해 하나의 수단이나 이벤트쯤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생긴 마찰이었다. 또 평택투쟁의 경우 비폭력적 방식에 의한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은 소수이고 평택 투쟁 전반을 이끌어간다 기 보다는 범대위를 비롯한 지도부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 활동에 어떻게 인터넷을 활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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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lal Demir and Ferda Ülker

"비폭력은 단지 폭력이 부재한 무언가가 아니다"

군사주의와 가부장주의는 터키 사회에 뿌리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최근 터키 '남동부' 쿠르드 족 거주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적 편견이 깊숙히 내재한 전쟁이다. 터키에서는 군사주의에 의문을 표하는 모든 시도들이 곧 '반역'행위로 여겨진다. 폭력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 장년층 그리고 종교적/민족적/정치적 소수집단들이다. 터키 사회에서 폭력은 그동안 너무나 내면화 되어서 대안적인 관점들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대안그룹 내부에서조차 가부장적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터키사회에서 군대가 미치는 영향력은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한' 남자로 인정을 받는 것 1997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거를 통해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각군참모총장들이 포함된)의 결정.('새로운 형태의 쿠데타(the post-modern coup') 경제적인 권력: 터키 군대의 물자 공급을 담당하는 한 기업(OYAK)이 터키 내의 가장 힘있는 투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음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이 군대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

터키 공화국은 오토만 제국이 무너진 뒤인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수립되었다. 강력한 군대의 유지와 '국가의 불가분성'에 대한 케말 세력의 원리는 군형법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지금까지 국가의 근본원리로 작동해왔다. 이와 같은 기치들은 터키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들을 초래했는데 예컨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가족 내에서나 수형시설에서 하급자에 대한 육체적인 폭력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발

비폭력이라는 단어는 1992년 '이즈미르 전쟁저항자 연합(Izmir War Resisters' Association, IWRA)'의 창립원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단체에서 비폭력은 항상 논의 주제가 되었는데 특히나 폭력적인 한 문화 내에서 비폭력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어떻게 찾을지가 주 관심사였다. 우리는 그룹 멤버인 오스만 뮤랏 윌케가 병역거부로 투옥이 되어서 그를 면회하러 가고자 했을 때 맞닥뜨릴 상황을 시나리오로 삼아 연습하면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누구도 우리 그룹에 비폭력을 의논하러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사람들이 비폭력에 좀 더 관심을 갖는 편이다. 비록 이 '전쟁저항자 연합' 그룹이 멤버들의 기력 소진으로 2001년에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즈미르 전쟁저항자 연합(이하 IWRA)'이 채택한 비폭력의 운동방식은 다른 좌파 운동 그룹과는 선명한 대비를 보였다. 당시 다른 좌파 그룹들은 우리 IWRA의 운동방식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유약하고 비효과적인 운동방식으로 여겼다. 이에 자연스레 우리는 주로 반군사주의자, 아나키스트 그리고 페미니스트 활동가들로 구성이 되었다. 아마 비폭력의 구호를 가장 큰 환영한 것은 당시 비폭력의 원리를 바탕으로 운동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에 있던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그룹이었던 것 같다.

정치적인 연대의 차원에서 우리와 가장 활발히 교감을 했던 것은 여성운동 그룹이었다. 처음 우리 운동이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반군사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여성 반군사주의 그룹을 구성하여 다른 여성 그룹들과 연대를 도모하고자 했다. 초기의 여러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침내 많은 개인단위의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여성 그룹들과 함꼐 트레이닝을 열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여성 운동 내부에서 기존의 좌파적 운동 방식이 아닌 새로운 그녀들만의 운동방식을 모색하던 고민과 우리 그룹의 지향이 맞아떨어진 측면도 존재한다. 여성들에게 있어 폭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장 첫번째 제기되는 질문이었고, 비폭력은 그녀들에게 그 해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좀 더 많은 여성들이 내적 자기 강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여성 그룹 사이의 연대는 깊어갔다.

우리와 가장 정치적으로 긴밀했던 그룹은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그룹이었다. 왜냐하면 이 그룹은 비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터키 병역거부자들이 완전거부자(즉 군복무와 여타 대체복무 모두를 거부하는)들이긴 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개인적인 성향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폭력에 대한 논의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였다. 터키 병역거부 운동 그룹의 지향은 비폭력에 관해서는 애매모호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모호함은 특히나 그들이 쿠르드족 해방 운동이나 기존 좌파 운동 그룹 출신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때 드러난다.

이즈미르 비폭력 트레이너 양성 운동

이즈미르 비폭력 트레이너 양성 운동(The Izmir Nonviolent Trainers Initiative, INTI)이 다른 곳의 도움을 받아 IWRA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이 운동이 질적으로 성장을 하는 데에는 독일 쿠르브 뷔스트로(Kurve Wustrow)의 트레이닝 코스와 1996년 4월 터키 포카 지역에 개설된 트레이너 양성 국제 트레이닝 센터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이즈미르 지역에 살았던 두 명의 독일 출신 트레이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2001년 겨울 IWRA가 활동을 종료했을 때에도 이 트레이너 양성 운동은 계속 되어서 이즈미르 지역 뿐만 아니라 터키 남동부 '위기' 지역인 디야르바키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트레이닝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진행이 되었다. 지금은 주로 자원봉사 형식으로 결합을 하고 있는 다섯 명(여성 넷, 남성 한명)의 트레이너가 있고 이들은 여행비용만 받으며 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 시간제로 결합하는 트레이너에게는 활동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2006년 6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2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트레이너를 위한 트레이닝 코스가 시작되었다.

트레이너 양성 운동(INTI)의 목표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위계주의와 가부장주의의 대안으로서 비폭력적인 원리와 구조를 설계하고 신장시키는 데에 있다. 우리의 대중적인 활동은 비폭력과 병역거부에 관한 세미나 그리고 집회를 기획하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비록 경찰이 우리가 작업한 많은 문서들을 몰수해가긴 했지만 우리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뿌리기도 했고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트레이닝 과정에서는 국회 바깥의 재야 그룹들, 인권단체, 여성단체, LGBT 운동단체 그리고 정당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즈미르 변호사 인권 센터'와 함께 변호사 집단 그리고 경찰들에게 인권 이슈들에 대한 교육도 진행하였다. 대략 우리 트레이닝에서는 풀뿌리 정치 운동 안에서 비위계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한 내용이나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 (가정과) 사회에 잠재한 군사주의적 속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비폭력적인 대안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었다. 개인적인 태도나 참여자들의 행동들은 항상 우리 워크샵의 기본적이고 주요한 주제들이다. 우리는 이론적인 기반들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비폭력 그리고 비폭력 행동들에 관한 실제 경험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헨리 데이빗 소로, 간디에서부터 오늘 날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이론적인 토대들에는 비폭력에 대한 아나키적 접근에 관한 내용, 아우구스토 보울(Augusto Boal)의 저서 '억압받는 자들의 극장(Theatre of the Oppressed)', 진 샤프(Gene Sharp)의 비폭력 전략 등이 있다.

우리 그룹은 모든 종류의 불평등, 차별을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따라서 폭력 역시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비폭력 행동과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방법을 계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믿는다. '비폭력은 미래 어느 순간에 달성될 열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금 이 순간의 수단'이라는 기치 하에 우리는 그 동안 '중립적'으로 보여졌던 일상의 행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원리와 가치들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비폭력의 방법과 수단들을 배우고 실천하고 가르쳐왔다.

우선, 우리는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신들의 의제로 설정하고 있는 다양한 단체들과 개인활동가들에게 하루 일정의 '입문' 트레이닝 과정을 제공한다. 둘째, 우리는 특정 그룹의 요구와 관심사를 반영한 '주제 기반 트레이닝'을 제공한다. 여기 주제들에는 편견, 갈등해결, 의사소통, 성차별 등이 있다. 셋째,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트레이닝 코스를 모두 밟은 뒤에 트레이너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에 대해서는 일주일 과정의 '트레이너를 위한 트레이닝' 집중 코스를 제공한다. 이 과정은 날로 증가하는 '트레이너 양성코스'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개설된 것이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위의 첫 두번째 트레이닝 과정을 여성그룹, 성소수자 커뮤니티, 인권단체, 생태집단, 평화단체 그리고 이즈미르, 망카라, 안탈리아, 아다나, 디야바키르에 있는 반군사주의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진행을 해왔다.

우리의 트레이닝 과정에 참여를 했고 트레이너가 되고자 했던 많은 개인들이 이미 벌써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폭력의 원리를 실천하고 폭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문제는 '비폭력 행동'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야르바키르(옮긴이 주, 쿠르드 족 관련 분쟁지역)에서 우리는 ('명예로운' 살인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 등과 같은) 근본적 행위들에 대한 비폭력적인 해결 방식 계발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비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작업에 대한 격려와 지지를 필요로 했고 동시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에 비폭력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신장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한 번의 일주일 과정 트레이닝에서 비폭력의 모든 원리들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이에 우리가 강구해낸 해결책 중의 하나는 모임에서의 논의를 지속하면서 다음 트레이닝을 위한 피드백을 유도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세 번째 트레이닝(옮긴이 주, 트레이너 양성과정)에서 터키 전지역의 트레이너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이 네트워크의 운영 원리를 모색하는 과정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트레이너 네트워크' 접근 방식을 통해 우리의 논의들을 지속하고 비폭력 트레이너 사이에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적, 전국가적 차원에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퍼뜨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

우리는 비폭력의 개념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가 기반이 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터키의 군사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폭력의 문화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비폭력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이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삶의 모든 차별들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비폭력 트레이닝 트레이너들은 사람들에게 비폭력에 관한 실제 경험을 제공하고 그들의 그룹에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줌으로써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비폭력 행동

터키에서 진행되었던 비폭력 운동의 사례들을 봤을 때, 그 행동들이 모두 완전히 비폭력에 기반한 것들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폭력이 하나의 근본원리로 작동하는 동안에도 몇몇 조직들의 비폭력 행동에서는 행동을 위한 비폭력 트레이닝이 빠지는 것과 같이 진정한 비폭력 행동이 되기 위한 몇몇 요소들이 결여되기도 하였다. 터키에서 그 동안 펼쳐진 주요한 비폭력 행동의 사례로 '밀리투어리즘 페스티벌'을 들 수 있다. 매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에 맞추어 진행되는 이 페스티벌에서는 서로 다른 도시들에 있는 주요 군사적 상징을 방문하고 대안적인 행사를 개최하며 병역거부자들의 선언이 이루어진다. 다른 사례로는 터키에서 진행중인 전쟁을 상기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던 '우리는 그것에 마주하고 있습니다(We Are Facing It)'라는 행사가 있다. 이 행사에서는 3개월에 한번씩 큰 행동이 펼쳐지면서 일년 내내 지속이 되었다. 여기서의 목표는 거리 극장과 같은 비폭력 방식을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비폭력 행동으로는 터키 행정의 중심도시인 앙카라의 군부대 앞에서 펼쳐진 '쌀의 날(Rice Day)' 행사가 있다. 우리는 군부대 앞에 가서 '우리는 바로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기존 사회의 전형적인 역할모델을 전복하는 반군사주의자들로써, '쌀의 날' 상징물들을 활용하여 우리의 연대감을 도모하고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지금 열거한 큰 행사들과는 별개로 작은 단체들에서는 단기적인 정치적 목표를 위한 행동들을 조직해왔다.

마치며

터키에서 비폭력이 존재해 온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는 대개 주변부 취급을 받았고 우리의 행동 역시 기대했던 만큼 효과적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성 단체와 성소수자 운동 그룹 덕분에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우리의 운동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우리가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정치적 그룹들의 날로 증가하는 비폭력 트레이닝에 대한 요구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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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미국 CIA와 닉슨 행정부의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정권이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이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리쉴라 하이너는 그녀의 책 (Unspeakable Truths, Confronting State Terror and Atrocity , 2001)에서 독재정권이 낳은 참혹함들을 그려냈다. “독재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하는 한편 대규모 체포, 고문(고문된 사람들 숫자는 최소 5만명에서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음), 살인 그리고 실종과 같은 자신들의 억압적인 정책들을 정당화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 독재정부는 수천 명의 반(反)정부 인사들과 입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고문하거나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같은 칠레 독재정권의 위협과 공포 속에 사람들 사이에는 불길한 침묵 상태가 이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비폭력의 힘에 대한 간디의 통찰력이 독재와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정립되고 발전해온 비폭력은 불의에 맞써 싸우는 하나의 갈등 해결 수단이자 원리를 의미하며, 더 넓게는 하나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비폭력은 부당한 상황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는 하나의 행동을 의미한다.)

진실을 향한 외침

우리는 사람들이 독재에 맞서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활동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다. 독재정권이 휘두르는 직접적인 폭력으로부터의 고통 뿐만 아니라 공포심으로 인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데에서 비롯된 자괴감도 감내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비밀 팜플렛과 리플렛을 찍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협을 감수하고 밤마다 거리의 벽들에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고발하는 선전물을 붙이고 다녔다. 이와 같은 행동의 기반에는 적극적인 비폭력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당한 독재정권에 맞서 이를 알려내지 않으면 우리 역시 독재정권과 공범자가 되고 만다는 믿음이었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행동들을 통해서 점차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알려내고 행동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설령 더 큰 위험에 봉착한다 할지라도 비밀리에 행해지는 저항 이상의 행동이 필요했다. 그 동안 수면 아래에서 칠레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행동들을 이제 대중적인 차원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문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움직임

카톨릭 신부이자 나중에는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The Sebastian Acevedo Movement Against Torture)의 대표를 맡았던 호세 알듀나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를 찾아와 (고문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한 내용과 비폭력의 역동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고 빈곤(에 저항하는 시위)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그룹이 견지한 원리에도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숙고 끝에 그 당시 벌어지고 있던 칠레 정부의 고문행위를 규탄하는 비폭력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고문에 대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의무가 있었고, 고문에 대한 침묵들을 걷어내어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은지 10년만인 1983년 9월 14일, 고문에 반대하는 운동은 산티아고에 있는 국가조사센터 본부 앞에서의 행동으로 막을 올렸다. 약 7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차도를 가로막고 '고문은 여기서 끝이 났다'라고 쓰여진 배너를 펼쳤다. 그들은 칠레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고 자유를 위한 찬송가를 불렀다. 이 운동 그룹은 1990년까지 매달 최소 한번씩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꾸준히 펼쳤다. 그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다른 정부기관들로 하여금 고문 사례들에 대해 조사하고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하는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행동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 당시 대중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긴급조치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학습된 무기력, 고립감, 두려움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을 마련해 놓을 필요성도 느꼈다. 당시 우리 운동에는 회의 장소나 사무담당자, 인프라와 같은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거리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회원 명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 프락치를 피하기 위해 참여자들은 지인들을 통해서만 찾아왔으며 행동 지침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당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평가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졌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참여자들은 구금이 되거나 기소가 되었을 때 합법/불법적인 제재에 직면하곤 했다. 최루 가스, 구타, 억류 그리고 기소는 시위대에 흔히 자행되던 보복성 조처들이었다. 고문 역시 체포됐을 때 당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문에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취재하려고 하는 방송, 신문 기자들도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몇 번의 행동에서는 참가자가 300명 때로는 500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참가자들은 교인, 비(非)교인을 불문하고 신부에서부터 수도사, 슬럼가 주민, 학생, 장년층, 주부, 인권활동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이데올로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주요 목표는 칠레에서 고문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고문에 대한 전(全)국가적인 자각을 일깨울 수 있는 방식을 택했고 이는 칠레에서 고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독재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1988년, 광범위하게 전개된 '위협반대' 캠페인에 이어진 '피노체트 반대 ' 비폭력 캠페인의 결과, 피노체트의 장기집권에 관한 국민투표는 결국 부결되었다. 피노체트 재임 중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여러 진상규명의 노력들과 국가적인 차원의 화해를 위한 시도들이 존재해왔지만, 비폭력 저항은 다른 어떤 수단들보다도 독재를 끝장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Roberta Bacic is a Chilean human rights researcher and activist who now lives in Northern Ireland. She has worked with War Resisters International’s Dealing with the Past Program. A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reviously published in the "100 Years of Gandhian Nonviolent Action" special issue of Peacework Magazine. For more info on Gandhi and Gandhianism, see more WRI links, and selected links to historical Gandhianism from the Peacework issue mentioned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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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클락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국제연대에 대한 호소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 1959년에 시작된 반(反)인종차별정책 운동진영에서는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널리 알리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전략으로 여겼다. 1960년 남아공에서 '샤퍼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이 발생하면서 각국의 정부들도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남아공이 영국연방에서 퇴출되였고, 1962년에는 유엔의 주관으로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어 그 이듬해 무기사용 금지를 골자로 하는 협정이 '자발적'으로 체결되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정책은 철회된 것은 한참 뒤인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 당시에 남아공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무역과 투자에 관한 것을 포함한 경제적 제재, 문화적 차원에서의 보이콧, 그리고 운동경기에서의 보이콧 이렇게 세 가지가 제재의 큰 틀을 구성하였다. 문화적인 차원 그리고 운동경기에서의 보이콧은 남아공에 심리적 차원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에 열렸던 올림픽에 남아공은 출전기회를 박탈당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럭비와 크리켓 국제대회 출전도 거부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남아공이 출전하는 테니스와 럭비 경기들을 방해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세계 곳곳의 항의행동들이 가한 압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아공에 대한 경제적인 제재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왜냐하면 당시에 영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유엔이나 영국연방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 샤퍼빌 대학살이 벌어진 후 촉발된 것으로 여겨지는, 남아공에 대한 민중적 차원의 '제재'와 운동들은 계속해서 펼쳐졌다. 이 민중적 차원의 운동이 절정일 무렵에는 심지어 영국 노동당 당수도 남아공에서 생산된 과일 구매 거부 운동에 지지를 표하기도 했다.

나는 남아공에 반대하는 이러한 운동에 뒤늦게 동참을 하였다. 학생신분 시절이던 1969년, 나는 그 당시 남아공에 대한 스포츠 보이콧에서 촉발된 좋은 분위기를 경제적 차원의 제재로까지 이어보려고 했던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속해 있는 학생운동 그룹에서는 대학당국으로 하여금 남아공에서 생산된 과일을 구매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이미 채택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운동의 타겟을 바클레이 은행으로 잡았다. 당시 바클레이 은행은 가장 많은 영국 학생들의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은행이었고, 내가 다니던 대학 역시도 바클레이 은행과 거래를 맺고 있었다. 이 운동에서 거둔 우리의 첫번째 성과는 바로 신입생들이 바클레이 은행 계좌를 열지 않도록 만드는 것과 기존 바클레이 은행 계좌 소유자들에게는 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운동에 동참하자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두 번째 성과는 학생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렌트비용을 바클레이 은행 계좌에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는 활동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마침내 대학 당국이 한 발짝 물러서게 되고, 대학 운영위원회의 주요 위원들이 사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은행에 대한 이와 같은 압박 운동은 각지의 노동조합 지부들이나 각종 단체, 모임들, 교회 등 영국 전역에 걸쳐 논쟁을 초래했다. 1972년, 나는 에 기고한 글 때문에 퀘이커 그리고 평화서약연합(Peace Pledge Union)과 트러블을 겪기도 하였는데, 글에서 나는 퀘이커와 평화서약연합을 향해서 그들이 바클레이 은행계좌 철회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남아공에서의 비폭력운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썼기 때문이다. 바클레이 계좌 철회 운동에 지역 인사들도 참여를 했고, 결국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된지 16년 만인1986년, 바클레이는 남아공 지부를 매각하였다. 그리고 협동조합(역자 주, 영국의 큰 소매체인 중 하나) 슈퍼들도 남아공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구매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다.

위에 소개된 형태의 보이콧이 힘을 얻은 것은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각계의 우려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1976년 소웨토 지역에서 벌어진 경찰에 의한 학살, 1977년에 있었던 스티브 비코의 죽음(역자 주:당시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던 주요인사 중 한명, 구속된 후 경찰에 의한 구타로 사망)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불어왔고, 1980년대에는 남아공 연합민주전선 대변인 데스몬드 투투에게 가해진 위협처럼 남아공 내부에서 벌어진 위기 상황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하였다. 이와 같은 이슈들 속에서 실제 보이콧을 열심히 전개했던 주체는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지역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노조와 교회가 기업들에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 노조와 교회가 남아공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영국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정책 반대 보이콧은 보통 지루한 '긴 행진'이 주를 이루었다. 국지적 차원에서는 각 지역 의회들이 남아공에 반대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채택하는 등 성공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가렛 대처 정부가 남아공에 반대하는 정책들을 펼치는데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국이 남아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꾸준히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하였다.

남아공 반대 보이콧들은 국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띄었다. 1970년대에 우리 영국인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남아공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앙골라로부터 수입되는 커피에 보이콧을 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980년대에는 아일랜드 최대 소매업계 중 하나인 '던스'의 노동자들이 남아공 상품 판매에 반대하는 파업을 4년에 걸쳐 펼쳤고, 이 파업은 아일랜드 정부가 마침내 남아공 상품 반입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비로소 종결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던 보이콧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지역 중 하나였다. 미국 시민들에 의한 남아공 반대 캠페인은 크게 대학가, 은행 그리고 공기업 이렇게 세 군데에서 펼쳐졌다. 그들이 거둔 성과는 상당했다. 보이콧이 시작된지 19년만인 1985년에는 남아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큰 은행이었던 체이스 맨하탄 은행이 앞으로 더 이상 남아공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1991년을 기준으로 당시 28개 주, 24개의 카운티, 92개의 도시 그리고 버진 아일랜드가 남아공에 대한 일련의 제재 정책을 입법화하였다. 1987년 말 기준으로는 200개 이상의 미국 기업들이 남아공에 대한 투자 철회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물론 제너럴 모터스(GM)나 IBM과 같은 몇몇 기업들은 다른 루트를 통해 남아공에서 자신들의 사업을 계속 진척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미국의 보이콧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대중들이 보이콧 운동들 과정에서 인종차별문제를 몸소 깨닫게 된 점과 대중들이 남아공 내에서 펼쳐지던 운동과의 연대감을 형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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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 지원 그룹

수감된 사람들을 지원하는 'MOC(Movimiento de Objeción de Conciencia)'의 활동은 수천의 완전거부자들의 수감을 불러온 징병 반대 시민불복종 운동(1971년-2002년)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수감자들을 지원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제안되고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의심의 나위 없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활동은 바로 '수감자 지원 그룹'의 활동이다.

실제로 이 '수감자 지원 그룹'들이 어떻게 활동하게 되는지 한번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보자. '거부'씨는 자신의 불복종의 댓가로 2년 4개월 하고도 하루의 형기를 살게 될 것이다. 수감이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친한 친구, 가족들과 자신이 속한 운동 그룹에서 나온 몇 사람이 함께 모이는 회의를 소집하려고 한다. 첫 번째 모임에는 그의 여자친구, 여동생, 이웃집 친구들 세 명, 대학 친구 한명, 사촌 한명, 반군사주의 운동 모임에서 만났던 사람 한 명 그리고 지역주민 한 명이 참석을 했다. 이 회의에서 사람들은 거부자가 되기로 한 그의 결심과 동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올 결과들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시민불복종이나 비폭력, 직접행동, 반군사주의 등과 같은 개념이 낯선 사람들도 있어서 이것들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두 번째 모임에서 그들은 모임의 목표들을 정했다. 장시간의 브레인스토밍과 논의 끝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세웠다.

1) 정서적인 지원

'거부'씨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은 재판 이전 과정과 재판 당일의 재판정, 그리고 수감 기간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 아이디어는 버스를 한 대 대절해서 재판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두 실어서 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감옥에 있는 '거부'씨 면회를 가는 것과 사람들에게 응원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의 목적은 그가 느낄 고립감을 최소화 하고 사람들과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지원은 그의 부모님처럼 주변의 '거부'씨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2) 물적인 지원

재판 이전과 수감 기간 중에 '거부'씨는 여러 가지 물적인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재판 전에 구속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있는 동안 그가 필요로 할 여러 가지 것들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수감 기간 중에는 책이나 종이처럼 그의 공부를 위한 것들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지원들 역시 수감자 지원 그룹의 역할이다.

3) 대외적인 작업들

'거부'씨가 속해있는 그룹 'MOC'은 대외적인 작업들을 수행하게 된다. 'MOC'이 준비한 시위의 경우에는, 특히나 그 시위가 '거부'씨의 재판이나 수감과 관련이 있다면 그를 지원하는 그룹 사람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거부'씨가 속해 있는 공동체들(그가 사는 지역이나 대학)에서 선전작업을 진행하면서 '거부'씨나 다른 사람들의 시민불복종을 널리 알려내는 작업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메일 리스트를 만들어서 '거부'씨의 소식 뿐만 아니라 반군사주의, 전쟁세 반대운동, 평화 교육 등과 같은 관련 정보들을 공유할 수도 있다. 가끔씩 '거부'씨가 감옥에서 보내오는 편지들을 공유하는 활동도 필요하다. '거부'씨 지원 그룹은 'MOC'과 연락을 계속 하면서 (예컨대 'MOC' 회의에 한 명이 참여를 하는 식으로) 'MOC'과의 연계 속에 수감자 지원활동을 계속 해나갈 필요가 있다.

수감자 지원 그룹은 수감자 본인 뿐만 아니라 'MOC'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수감자 지원 그룹 멤버들이 'MOC'의 활동들에 함께 참여를 하면서, 이 운동에 새로운 사람들이 입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운동 단체와 수감자 지원 그룹 그리고 수감된 당사자 사이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서로간의 지속적인 의사소통이 중요할 것이다. 운동의 목소리는 감옥이 아닌 운동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운동그룹 그리고 수감자 지원 그룹의 지속적인 수감자 면회는 앞으로 운동을 지속해나가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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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대한 평가과정을 통해 우리는 행동의 경험을 유의미한 것으로 남길 수가 있다. 대개의 평가는 개인적인 감회나 친구들과의 대화, 활동을 준비하는 데 주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리더들')들과의 대화처럼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행사 이후 피드백을 거쳐 교훈을 남길 수 있는 하나의 평가 틀을 보여주고자 한다. 평가가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평가를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버리기보다는 준비된 하나의 틀 속에서 평가 역시 집단활동의 하나로 구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식적인 평가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른 차원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던 참여자들이 모두의 노력, 경험, 헌신들을 공론화하고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에 참여 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행동을 기획하고 준비했던 사람들 모두는 이 평가과정까지 열심히 참여할 필요가 있다.

평가과정이 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잡게 됐을 때 구성원들은 행동의 과정이나 내용들에 대해 생산적이고 솔직한 피드백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명심할 것은 평가 과정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들에 대해서 꼭 모두가 동의나 합의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에서 좋았던 점들, 아쉬웠던 점들 모두가 논의될 수 있어야하며, 단 가능하다면 행동의 긍정적인 부분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의 틀은 주의깊게 설계되어야 한다.

평가에서 다뤄지는 사안들 중에는 양적인 것에 관한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리플렛을 나눠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지, 얼마나 많은 보도가 되었는지, 도로를 얼마나 오래 가로막고 있었는지 등등. 만약 이와 같은 정보들이 평가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수치들을 계산하는 나름의 방식을 계발해서 이를 토대로 행동 과정에서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사람을 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때로는 이와 같은 숫자 놀이가 평가의 원래 목표와 멀어져버리는 결과를 나을 수도 있다. 특히나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예를 들어, 앞서의 시위보다 이번 시위에 나온 사람들 숫자가 더 늘어났지만 실제로는 이 시위의 파급력이 줄어든다거나 처음 참여한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낀다거나 혹은 시위 자체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예로는, 어느 군 부대 입구를 계획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가로막는 행동을 펼쳤지만 실제로 이 행동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며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기도 저하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요컨대, 평가의 기준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한 행사의 애초 의도했던 목표와 조응하여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에는 평가과정에 사용될 체크리스트가 제시되어 있다. 이 리스트는 다른 영역의 활동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1. 비전과 전략 그리고 구체적인 목표

행동에 대한 전반적인 비전/전략/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는가? 행동이 문제/갈등 상황과 연관이 되었는가? 참여자들은 누가 이 행동을 기획했는지 인지를 했던가? 참여자들은 전망/전략/구체적인 목표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2. 원칙과 규율

행동의 규율에 대한 명확한 논의 과정이 있었는가? 규율이 행동 과정에서 잘 지켜졌는가? 계획했던 구체적인 전략과 실제 수행은 규율에 부합했는가? 참여자들이 자기 자신이나 혹은 다른 참여자가 합의를 기초로 구성된 규율을 따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느꼈는가?

3. 준비와 실습

준비/실습 과정은 적절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충분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도움을 주었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는가? 준비/실습 과정은 참여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는가? 참여자들은 준비/실습 과정에서 뭔가 배운 것이 있다고 느꼈는가?

4. 전술

계획한 전술은 적절했는가? 행동이 계획한 전술대로 진행이 되었는가? 전술은 참여자들의 필요와 기대를 충족시켰는가?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잘 대처했는가? 전술은 규율/전망/목표와 일치하였는가?

5. 조직

그룹 구성 및 조직과정은 이 행동의 목표/전략/비전/규율에 잘 부합하였는가? 그룹 구성은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는가?

6. 결과

1) 참여자

행동이 참여자들과 연관이 되었는가? 행동이 더 많은 참여자들을 불러모았는가? 참여자들은 행동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느꼈는가? 행동이 참여자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는가?

2) 행동의 메세지를 전달받은 사람들

행동의 메세지는 명확했는가? 행동의 메세지가 목표에 도달했는가? 행동의 메세지가 더 많은 행동과 소통을 증대/감소시켰는가? 상대집단으로부터의 반응이 있었는가? 이와 같은 상대집단의 반응은 이 행동의 목표와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가?

3) 제3자 집단

그들은 이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였는가? 이 행동이 그들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많들었는가? 이 행동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왔는가?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에 따라 함께 움직였는가(중립적 입장, 관심표명, 입장선회)?

이 평가 폼은 1977년 7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열렸던 비폭력행동 트레이닝에 관한 국제세미나에서 계발된 것이다.

Other resources for eval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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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행동들은 다양한 종류의 작업들을 수반한다. 그 중에는 가시적으로 들어나는 것도 있고 (예, 거리를 점거한 시위대나 언론담당자), 한편으론 덜 드러나거나 아예 잘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역할이라도 빠지면 효과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지기에 모든 역할들은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행동 준비과정에서의 역할들

행동 총괄자(코디네이터) 재정담당자 연구자 장소 관련 담담자 대외협력 담당자 (다른 단체와의 소통 및 조직) 물품 및 장비 담당자 모임 진행자 선전물 관련 담당자 언론 담당자 ('언론의 역할' 장 참조.) 방송장비 담당자 서기

행동 현장에서의 역할들

연행을 각오한 사람 (시민불복종 행위를 펼치는)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사람들 경찰과 소통 및 협상을 담당할 사람 행사진행 및 모니터 요원 경찰의 주의를 흐트리는 역할을 담당할 팀 언론 담당 대변인 언론 관련 실무팀 소통 담당팀 시위대/피켓팅을 하는 사람/구호를 외치는 사람/노래를 부르는 사람 리플렛 나눠주는 사람 비디오 촬영자 사진기사 의료지원팀 법률감시단 수감자 후원팀

행동 이후의 역할들

법률적 지원. ('법률적 지원' 장 참조.) 변호사 행동 관련 기록을 정리하고 문서로 만들 사람. ('캠페인 사례연구 가이드' 장 참조.) 비용 마련 담당자 대변인 탄원서 작성, 언론 기고 역할 담당자

인용 출처 : Rant Collective (www.rantcollectiv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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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사법체계는 각 국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활동가들이 연행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의 과정에서 '법률 지원팀'은 언제나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글에 제시된 법률 지원팀과 관련한 조언들은 영국에 기반을 둔 '활동가 법률지원 프로젝트' 팀의 보고서 첫째 장에서 많이 빌려왔다. (http://www.activistslegalproject.org.uk)

법률적인 지원은 효과적인 행동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법률 지원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보통 경찰서 주변을 서성이며 연행된 사람들이 석방되기까지 수시간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현장에서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한다거나 사진에 나온다거나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없다면 어떤 행동의 경우는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다. 아마도 법률지원팀이 없다면 '전선'에 있는 사람들 절반은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법률 지원 활동의 목표

행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 연행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돕기 연행된 사람들이 구금 중에 적절한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경찰 그리고 변호사에게 주지시키기. 연행됐던 사람들이 풀려난 뒤에는 감정적,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

법률 지원팀의 역할

법률 지원팀의 숫자는 행동의 규모나 예상되는 연행자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법률지원팀이 담당할 필수적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연행과정, 경찰서에 도착해서의 과정, 발생할 수 있는 폭력, 예측가능한 결과, 보석, 첫 심리공판 등에 관한 법률적 정보들이 나와 있는 소책자 제작 '경찰인권침해 감시카드' 제작 및 배포. (연행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처를 기재해놓는다.) 연행자들이 경찰서에서 법률 지원팀으로 거는 전화를 상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정하기. 정보 파악 : 현재 연행이 확인된 사람들의 소재와 연락처 그리고 석방 여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경찰서에서의 지원 : 각 경찰서에 유치된 연행자들에 대한 지원, 변호사들과 연락, 석방된 연행자들 만나기. 석방된 연행자들을 태우러 다닐 차량과 운전자를 섭외하고 석방된 연행자들이 잘 수 있는 곳을 준비해놓기. 행동이 끝난 뒤 피고인들의 대응회의를 꾸리기.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연행의 위험을 감수하는 법률(인권)감시단과 다르게 법률 지원팀은 어떤 순간에서도 연행이 될 만한 위험을 감수해선 안 된다. 유치장에 갖힌 법률 지원팀 요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대규모 집회에 필요한 법률 지원팀을 구성하는 것과 관련한 더 많은 정보는 다음의 미국 웹사이트에 있는 '법률 지원팀 구성하기'를 참고하자. ( http://www.midnightspecial.net)

더 많은 법률적 정보 및 워크숍과 관련해서는 '활동가 법률지원 프로젝트'(info@activistslegalproject.org.uk 또는 http://www.activistslegalproject.org.uk)에 문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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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대한 준비

가끔은 자신이 직접 발담그고 있지 않는 운동의 한 부분에 참여한다거나 혹은 단순한 집회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한시적인 행동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하나의 행동은 자신이 속한 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매번의 행동들은 우리 운동의 목표에 도달하는 중요한 과정들을 구성한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행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체크리스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동 계획 단계

권력분석하기

정세 판단 혹은 상황 분석하기. 준비과정의 큰 틀 짜기. 의사결정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 이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 설정하기. (예, 우리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상대 집단 설정하기,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이 행동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표 논의하기. (어떤 행동 혹은 행사를 할 것인지) 이 행동의 준비 단계와, 현장, 그리고 행동이 끝난 후 이렇게 각각의 단계에서 그룹의 목표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해 준비하기. 이 행동이 보여줄 비폭력적인 속성을 정의하기. (구성원이 공유하는 비폭력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문구로 명시된 원칙이 있는가?) 행동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여) 누가 이 행사 전체의 조율을 담당할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 행동을 종료할 것인지.

(보다 많은 아이디어들과 연습을 위해서는 캠페인에 관한 장, "효과적인 전략 개발하기" 및 "캠페인의 구성요소"를 참고하라.)

대외협력

다른 그룹이나 공동체와 함께 활동을 할 의사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그룹과 소통할 것이며 누가 소통을 담당할 것인가? ('우리편 찾기' 게임을 참조할 것.)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선전물을 뿌릴 것인가? 그렇다면 선전물 작업은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 행동에 관한 광고는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활동에 동참해달라는 메세지를 뿌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 작업은 누가 할 것인가? 언론 대응은 어떻게 할 것인지? 취재요청서를 미리 뿌릴 것인가? 현장에서 기자들을 상대할 담당자를 둘 것인가? 우리 스스로의 방송장비를 챙길 것인가? 언론 담당팀을 따로 만들 것인가? (언론에 관한 장 참조.)

참여자들의 준비

참여자들은 어떠한 활동들에 대해 준비할 것인가? 오리엔테이션이 있는지? 동아리를 형성하는 과정이 있는지? 비폭력트레이닝이 있는지? 기술 훈련이 있는지? 관련 법률에 대한 브리핑이 있는지? 참여자들이 행동의 시나리오를 결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참여자들의 사기는 어떻게 고양시킬 것인지? 논의과정은 모두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효과적인 행동을 위해 단순히 '직접행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자잘한 역할들이 있다는 것이 공유가 되고 있는지?

물품/장비 준비

행동이 예정된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계획은 잘 준비되었는지? 필요한 장비나 물품들은 다 준비되었는지? 장비들이 어떻게 배치될 것인지 계획이 되었는지?

행동의 현장에서

경찰과 소통을 담당할 사람에서부터 인권감시단, 언론담당자, 의료지원팀, 연행을 각오한 사람들과 이를 지원하는 사람들, 일반 시위대에 이르기까지 행동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역할자들 사이의 소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행동 준비단계에서부터 행동 이후까지의 역할 분담' 장을 보라.) 누가 카메라와 비디오로 행동을 기록할 것인가? 의사결정과정은 명료한가?

행동이 끝난 후

누군가가 연행이 되었을 때 이를 지원한 법률팀과 수감자지원팀이 있는가?('법률적 지원' 및 '수감자 지원' 장을 참고하라.) 행동에 대한 후속 언론 대응이 있는가? 오늘 있었던 행동과 관련하여 주류언론, 대안언론들에 뿌릴 자료들을 준비하고 있는가?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였는가? ('행동 평가' 장을 보라.) 이 행동에 대한 백서를 남길 계획이 있는가 (향후 사례연구와 관련하여)? ('캠페인 사례연구 가이드' 장을 참조하라.) 이 행동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행동이 우리 운동에 도움이 되었는가? 만약 이 행동이 운동의 한 부분이었다면 이 행동이 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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